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03 : 창세기 8장~14장

어멍 2010. 2. 18. 00:27
 

8장 21절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어릴 때부터 악하지만, 이번처럼 땅 위의 모든 생물을 멸망시키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물의 심판을 끝내시고 노아에게 다시는 땅 위의 모든 생물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언약하시는 말씀.


9장 21절
그(노아)는 포도주를 먹고 취하여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22절
가나안의 조상 함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23절
그러자 셈과 야벳이 옷을 가지고 와서 어깨에 걸친 다음, 뒷걸음질로 장막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드렸습니다. 그들은 얼굴을 돌려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았습니다.


    잠에서 깬 노아는 함에게는 저주를, 셈과 야벳에겐 축복을 내린다. 하나님과 부모의 흠을 들추는 불경, 불효에 대해 경계하는 구절이다. 하지만 노아의 흠이 단지 벌거벗은 것을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부름에 벌거벗은 몸을 가린 채 두려워 숨은 것과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것 자체가 흠은 아니다. 바로 선악에 대한 자의적 분별을 갖게 된 사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 대해 두려워 숨은 것이 본 뜻이다. 마찬가지로 노아의 흠은 벌거벗은 것도 아니고 포도주를 먹은 것도 아니고 취하여 정신을 놓은 채 잠이 든 것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간혹 교회의 허물, 목회자의 입에 담기도 흉한 범죄와 타락상을 옹호하고 감추는 데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여 쓰는 경우가 있다. 단지 주의 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교회 내부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리 더럽고 흉악한 일일지라도 폭로하여 분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거다.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오직 그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감춰주고 기도하고 심지어 축복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거다. 잘못된 일이다. 아무리 땅 위의 윤리보다 하늘의 법이 우선이라지만 교회를 치외법권지역,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으로 이끄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과 권능에 반하여 목자들의 세속적 권력만을 강화시켜주는 일이다. 교회는 더욱 오염되고 성직자들은 더욱 타락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씀도 쓰는 사람, 쓰는 목적에 따라 오용, 악용될 수 있다. 하긴 예수님을 유혹하고 시험할 때 사탄 역시 성경 시편 말씀을 인용하였다는데 인간들이라고 다를 까닭이 없다. 성경 말씀을 옳게 읽고, 옳게 해석하고, 옳게 써야 한다.



11장 9절

여호와께서 온 땅의 언어를 그 곳에서 뒤섞어 놓으셨으므로, 그 곳의 이름은 바벨이 되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 내용인 즉은 땅 위의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온 땅에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으려 하자 하나님께서 ‘이 일은 그들이 하려고 하는 일의 시작에 불과하며 그들은 하려고만 하면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 염려하여 언어를 뒤섞어 놓자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흩어지고 성 쌓는 일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다. 보통 알고 있는 ‘인간의 욕심과 교만에 불같이 분노하시어 바벨탑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분노는 아니지만 걱정근심하시고 심지어 인간에 대한 일말의 경계심, 시기심마저 느껴지는 뉘앙스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첨단과학, 생명과학이 날이 새면 괄목성장하고 초고층 수퍼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서는 현대는 바벨탑의 시대보다 더한 교만의 시대다. 특히 초고층, 초대형 건축물들은 그 교만과 권세가 하늘을 찌를 뜻하여 정치적으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그 자체로 권력의 상징이고 권력의 중요치적으로 진행되고 홍보된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거대건축물들이 지어진 후로 그 권력과 나라는 위기를 맞고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수요도 없이 무리하게 건설되어 당시 엠프티 스테이트 빌딩으로 불렸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지어진 후로 경제대공황을 겪었으며 두바이는 세계 최고층 건물을 완공했지만 빚더미에 앉아있다.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제 2 롯데월드 빌딩, 4대강 사업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의 말대로 두바이를 배워야 한다. 두바이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완공된 후 후유증에 시달린다 해도 되돌리긴 힘들다. 하나님처럼 무너뜨리거나 맑은 자연으로 일순간에 창조, 복원할 순 없다. 그럼 어떻게 멈추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처럼 그들의 언어를 뒤섞어 갈라놓으면 된다. 탐욕과 이권이라는 바벨탑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의 언어를 바꾸어 생각을 갈라놓고 세력을 갈라놓아 그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면 된다. 그 언어는 개발의 언어, 성장의 언어, 돈과 우상의 언어가 아닌 보존의 언어, 삶의 질이라는 언어, 인간과 하나님의 언어라야 한다.



민중예술의 선구자, 최초의 농민화가로 불리는 네덜란드 피터 브뤼겔의 1563년 작품 <바벨탑>



    몇 해 전 한국에서 국제언어학회 총회가 열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주제는 언어의 다양성 보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는 언어들, 심지어 오직 한 명만이 기억하고 있는 언어가 그의 생과 함께 곧 영원히 사라져갈 운명이라고 한다. 이런 인류의 희귀언어에 대한 보존방안을 논의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언어는 문화의 중요한 축이요 자양이다. 언어의 멸실은 인류 앞에 차려진 풍성한 밥상이 빈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의 요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요리의 중요한 원재료에 해당한다. 언어의 통일은 문화의 획일화를 의미하고 언어의 다양성은 오히려 권장될 일로 여겨지고 있다. 국제언어학회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의미가 깊다. 그럼 이 구절은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나.

    성경, 특히 구약은 사실, 역사와 구별하여 상징, 의미에 주의해서 읽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아내 말로는 태초의 언어가 라틴, 히브리, 영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으로 가지를 치고 발전해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의견이다. 그럴 것이다. 태초에는 아주 간단한 의미와 기본적인 사물만을 가리키는 몇몇의 단어와 표현만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오지에서 그들 고유의 문화와 생활환경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 원시부족의 언어는 세밀하게 발달하지 않았다. 하나 이상의 숫자는 그냥 ‘많다’로 통일해서 말하는 식이다.

    내 의견은 땅 위에 언어의 상이함이 나타나고(하늘의 언어는 아마 한가지일 것이다) 그로 인하여 사람사이의 의사소통의 부재, 갈등과 다툼,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라 여긴다. 심판은 아니더라도 징벌, 징계의 의미가 있다. 분명한 것은 다양성을 권장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징벌로서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에 의미가 더 크다. 교만하지 말고, 까불지 말라는 거다.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원죄가 있는 너희에게 그 댓가로 너희끼리 아웅다웅 떠들며 싸우는 운명을 지게 해준 거다. 거대 건축물, 땅 아래의 권력, 언어의 다양성 등을 논외로 하고 성경의 본래의 의미는 원죄를 범함으로서 하나님에게 여자는 아기를 출산하는 고통을, 남자는 끊임없이 땅을 가는 수고를 받게 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인 듯하다.



12장 11절

이집트에 이르기 바로 전에 아브람이 아내 사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매우 아름다운 여자요.

12절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면, ‘이 여자는 저 사람의 아내다’라고 말하며 나를 죽이고 당신은 살려줄 것이오.

13절

그러니 당신은 그들에게 내 누이라고 말하시오. 그러면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고 당신 덕분에 나도 살 수 있게 될 것이오.”

 

    그래서 결국 사래는 이집트 왕 파라오의 아내가 되고 그 일로 아브람은 파라오에게 나귀와 낙타와 종까지 받는 등 그 덕을 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이 일을 아시고 파라오에게 재앙을 내리시지만 아브람에겐 별다른 재앙을 내리셨다는 구절은 없다. 예배에 충실하고 여호와를 극진히 섬겼던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인가? 의문이다. 어쨌든 아브람은 우여곡절 끝에 ‘그의 아내와 그에게 속한 사람과 재산을 가지고 이집트에서 떠나가게’ 된다.[창 12:20] 하나님이 애초에 12장 2절과 3절에서 아브람을 축복하시고 그에게 언약하신 약속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각별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아브람의 믿음도 각별하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세 조상 중 아담이 '첫 인류의 조상', 노아가 '새 역사의 조상'이라면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다.

    아브람의 행위는 하나님의 차별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윤리적 잣대로 보면 비판받을 만하다. 어찌보면 파라오가 피해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파라오를 속였다는 것은 일단 제쳐놓고, 아브람에게 복에 복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길, 섭리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일단 제쳐놓고 아브람의 입장에서 과연 일방적인 비난만을 받을 일이었을까?


    <史記>에서 언뜻 읽었던 얘긴데 갑나라의 사신이 을나라의 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을나라 왕의 심술이 발동하여 자국에 있는 갑나라 출신 죄인을 어전으로 잡어 들여 갑나라 사신이 보는 앞에서 호되게 질책하며 죄를 묻자 갑나라 사신이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이” 갑나라 사람이 을나라에 와서 저렇게 변한 것이라 대꾸하여 을나라 왕이 그 재치와 배포에 크게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로 찌그러질 수도 있고 한라봉처럼 크고 당도 높은 고품종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상대적인 것이고 처한 환경이 크게 좌우한다는 거다. 윤리와 도덕도 마찬가지다. 때와 장소마다 다를 수 있다. 특히 생존전략 차원에선 때론 선과 악, 옳고 그름이 역전되기도 한다. 생존이 윤리와 규범에 우선한다.

    사자 무리는 사자 무리대로 생존의 방식이 있고 사슴 무리는 사슴 무리대로 그것이 있다. 얼마 전 방영됐던 MBC <아마존의 눈물>이란 다큐에서는 어른들이 온 몸에 검은 칠을 하여 재규어로 분장하고 어린 아이들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 경기라도 일으킬까 걱정될 정도로 그들을 긴 회초리로 가혹하게 때리는 풍습을 소개한 적이 있다. 어미 독수리가 아기 독수리를 둥지에서 떨어뜨리듯이 밀림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한 그들만의 교육방법이라고 한다. 체벌을 금지하는 나의 교육철학으로 볼 때는 이해하기 힘든 점이지만 그들만의 생존방식이다.

    사람이 다른 타인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 한 사회, 한 국가가 다른 사회, 다른 국가에게 자신만의 문화, 제도, 종교, 이념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야만을 계몽하고 비인도적 범죄를 인류가 공동으로 예방하고 징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거의 타인, 다른 공동체나 국가를 파괴하고 타락시키고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시아, 남미, 아랍을 향한 서구의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의 강제이식이 생각처럼 쉽지 않고 거의 실패하는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미국에 의한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이 대표적이다.

    자신만이 옳다는 순혈주의, 원리주의는 위험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힘들고 애시당초 여기에서 저기로 완벽하게 옮겨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문화와 풍습에 따라 변용될 수밖에 없다. 근본 줄거리를 잃어버려서도 안 되지만 너무 고집하고 얽매여서도 안 된다. 개인적으론 백인의 얼굴을 한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황인종 하나님, 흑인 하나님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중요한 건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인류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님, 닮아야 할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선교활동에도 반드시 참고해야 할 것이다.



14장 18절

멜기세덱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브람이 전쟁에서 이기고 조카 롯을 구해 내어 개선할 때 멜기세덱이 그를 영접하는 장면. 멜기세덱은 해설에 의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형이요, 그림자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