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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책읽기

<위대한 개츠비>는 걸작인가, 걸작이 아닌가? 개츠비는 위대한가, 위대하지 않은가?

어멍 2020. 2. 27. 23:36


 

<위대한 개츠비>는 걸작인가? 걸작이 아닌가?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 옮김, 문학동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다. 그래서 학창시절에도 한번 읽었고 작년에도 한번 읽었다. 독후 감상은? 그때완 많이 달랐다. 여전히 재밌었지만 감수성 예민한 소년시절의 떨림이 순식간에 휘몰아치는 폭풍우였다면 다 큰 성인으로서의 감상은 잔잔하게 내려앉는 이슬비 같았다. 소년은 개츠비가 X나게 멋있었고 아재는 개츠비가 안타까울 정도로 불쌍했다.

 

    재밌지만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작품의 결점이랄까... 아쉬운 부분이 새로 눈에 들어온다. 문체도, 표현도, 등장인물들도 너무 감각적이다. 무력, 유약한 느낌이 일 정도로 너무 선이 가늘고 심미적이다. 한마디로 호연지기가 없다.

 

    은빛 후춧가루가 뿌려진 별밭 - 34p

 

    표현은 신선하고 아름답다. 심미적이고 시적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친다.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밖이 훤히 비춰 보이는, 너무 얇고 부드러운 반투명한 실크커튼이 미풍에 하늘하늘 느리고 부드럽게 흔들리는 것같이 편안함을 넘어 나른할 지경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의 서시도 어떤 면에선 호연지기가 없이 유약하지만 개츠비의 감각적 유약함과는 결이 다르다. 개츠비에는 도덕적 숭고함, 절대적 순결함은 없다. 문학에서 도덕적 교훈을 얻을 것도 아니고 굳이 우열을 따지기도 뭣하지만 윤동주의 순결이 개츠비의 순정보다 우리 영혼에 호소하는 바가 깊고 강하다.

 

 

 

2013년작 <위대한 개츠비>

 

 

    하지만 개츠비는 멋있다. 간지가 좔좔 흐르는 아메리칸 섹시가이면서 낭만 넘치는 순정남, 예민하지만 상처받기를 두려워 않는 용감한 로맨티스트다.

 

 


1974년작 <위대한 개츠비>

 

 

    손발이 오그라들고 대패로 돋은 닭살을 밀고프지만 핑크빛 수트도 넉넉히 소화해내는 폼생폼사 패셔니스트다. 물론 이것은 로버트 레드포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서 가능한 일! 나를 포함한 보통 아재가 이렇게 걸친다면 졸지에 장날 각설이 되기 십상이다. 하여튼 들창코에 똥배 나온 개츠비는 상상할 수 없다.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개츠비의 스타일, 패션, 외모는 멋있다. 충분히 상상이 가고 그림이 그려진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만의 속 깊은 생각, 성격, 영혼 깊숙한 곳에서 느끼는 갈증을 보여주진 않는다. 알 수가 없다.

 

    개츠비는 작품 초반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미스테리한 미지의 인물로 나오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갑툭튀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의 이력과 성격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없다. 어디로부터 어떻게 와서 왜 지금 이렇게 행동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없다. 독자는 소개팅에서 갑자기 운 좋게도 훤칠한 킹카를 만난 격이다. 잘난 외모에 럭셔리하긴 한데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까탈스런 놈인지, 둔한 놈인지, 속 깊은 놈인지, 해맑은 놈인지는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작가의 인물묘사가 양도 적고 구체성도 떨어진다.(그래서 소설은 비교적 짧은 편이다.) 인물의 성격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결정적인 에피소드나 장면들이 적고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심리묘사도 적다. 인물들의 세밀한 성격, 심리묘사에서 사골까지 우려낸 국물맛을 맛봤던 <적과 흑>, <죄와 벌>, <대망>과는 달리 이 작품의 인물들은 설렁설렁 스쳐지나가는 느낌이다.

    개츠비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종이인형처럼 입체감이 없이 평면적이고 냄새가 없거나 희미하다. 울퉁불퉁, 뾰족뾰족, 둥글둥글한 도드라진 형태가 없다. 땀냄새, 사람냄새가 없다. 흙냄새, 꼬린내, 똥냄새에다 광대뼈가 큼지막할 것 같은 넙대대한 <그리스인 조르바>가 책 밖으로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만 같다면 개츠비는 책 속에서 그윽한 미소와 눈빛만을 날리고 있다고나 할까!

 

     한편 데이지는 또 어떤가? 감각적이고 감수성 예민하기로는 개츠비에 뒤지지 않는다. 쉽게 웃고 쉽게 울고 쉽게 감동하고 쉽게 싫증내는 그녀는 꾸밈이 없는 대신 신중함 역시 없다. 어린아이의 순수함, 천진난만함과는 거리가 먼, 한마디로 어리다.’ 연령은 높지만 그녀가 돌보는 그녀의 어린 딸보다 그리 더 성숙해 뵈지 않는다. 인내, 배려, 조심성, 사려 깊음인문철학적 소양, 지혜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순간 갑자기 데이지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셔츠 더미에 파묻고 격렬하게 울기 시작했다. - 중략 - 너무 슬퍼. 한 번도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은 본 적이 없거든.” - 117p

 

    데이지가 개츠비의 대저택 드레스룸을 구경하는 장면이다. 아름다움을 보고 감동하는 것, 기쁨과 감사와 흡족함을 넘어 슬픔을 느끼는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미의 유한성에서 오는 모든 것의 덧없음이 슬픈 경우고 두 번째가 이제까지 이런 기회, 호사를 한 번도 누린 경험이 없었음이 슬픈 경우다. 데이지의 경우는 물론 두 번째다.

    자기감정을 잘 드러내는 경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체면과 평판에 굳이 연연하지 않고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꾸밈없는 소탈한 경우고 두 번째가 인내나 절제의 미덕 없이 자기감정을 자가증폭하며 무분별하게 노출하는 경우다. 말할수록 자신의 말에 흥분, 분노하고 울수록 자신의 눈물에 슬퍼하며 떠나갈 듯 흐느낀다. 데이지의 경우는 물론 두 번째다.

    혼잣말이라도 감탄, 한숨, 장탄식, 짜증, 욕지거리를 쉽게 내뱉는 것도, 자신의 감정에 즉각 공감을 보여주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를 표명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쉽게 화를 내는 것도 넓게 보면 이 범주에 속한다. 마인드 컨트롤, 표정관리, 자제력, 신중함, 자기객관화를 성숙함의 척도로 본다면 확실히 데이지는 미성숙하다.

    위 장면은 명품백을 오매불망 꿈꾸던 젊은 여성 쇼퍼홀릭이 세계의 모든 최고급 희귀 명품백들이 한자리에 모인 샵에 들어섰을 때의 감동과 흡사할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저도 모르게 감동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사지 못하고 아이쇼핑에 그치더라도 그 순간을 향유하며 성취감을 느낀다.

 

    데이지는 그렇게 자기 욕망에 솔직한 무지하고 나약하고 무책임한 철부지였다. 속물이지만 아등바등 돈 몇 푼에 연연해하는 블루칼라의 불쌍하고도, 답답하고도, 영악한 인색함과는 거리가 멀기에 ‘(속물)근성이라고까지 부르기엔 어색한, 악의도 없지만 대책도 없는 속물이다. 영화 <기생충>의 대사 부자들은 구김살이 없어. 돈이 다리미야. 구김살을 쫙 펴준다니까처럼 럭셔리한 속물이다. 그렇다고 마냥 구김살 없고 해맑고 순수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녀의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무책임이 가장 적당할 듯싶다.

    사랑하지만 책임지지 않고, 사랑받지만 마냥 자유롭고 싶다. 그녀는 몸은 성인이지만 품성과 능력은 미성년자다.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한다. 남편에게도, 옛 연인 개츠비에게도, 친척에게도, 친구에게도 심지어 그녀의 어린 딸에게도 사랑받고 싶어한다.

    그녀는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사랑하기 원하지만 정작 그녀가 사랑한 것은 인간 개츠비가 아닌 개츠비가 걸친 영국제 명품 셔츠였다. 더 정확힌 명품 셔츠가 아닌 명품 셔츠 더미 속에서 느끼는 감동, 행복감, 도취감이었다. 사실 쇼퍼홀릭은 상품보다 쇼핑 자체가 행복한 것이다. 명품족은 품(품질)보다 명(이름값, 희소성, 평판, 과시나 자기만족)을 소비하는 것이다.


    문장도, 인물의 성격묘사도 그리 탄탄하진 않지만 둘을 비교하자면 개츠비보다 데이지 쪽이  그나마 좀 낫다. 더 손에 잡히고 구체적이다. 개츠비의 언행은 가끔 뜬금없거나 이해가 안 되는 측면이 있지만(소설 전개상 미스테리한 인물로 설정한 이유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샤프한 외모완 달리 약간 굼뜬 느낌마저 준다.) 데이지의 언행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충분히 개연성을 납득할 정도로 독자가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결론이다. 걸작, 명작, 수작, 평작, 졸작, 망작이 있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무엇인가? 과연 걸작의 반열에 오를 만한 위대한 작품인가? 답은? 그렇다. 걸작이다. ?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까! 웬만한 출판사의 세계걸작문학선의 한자리를 꼭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문학에 일가견이 있는 문학도나 전문가가 아니니까!

    하지만 작품은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세계문학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몫을 차지하는 영미문학의 덕을 본 면이 있으리라 본다. 걸작이라도 내 서재에 꽂아놓는다면 세계걸작선의 말석을 턱걸이로 차지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품 여기저기 아쉬움이 크다. 내 취향탓이겠지만 조각에 비유하자면 균형, 비례, 세밀하고 구체적인 묘사, 아래에서 위까지 일이관지하는 완전성이 부족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작가만의 새롭고 독특한 문학적 세계를 개척하였는가 하는 점도 의문이다. 좀 거창하지만 작가의 치열한 예술혼이나 어떤 깊은 깨달음을 주는 대목도 없다. 단지 개츠비라는 어메리칸 섹시 가이 순정남과 데이지라는 어메리칸 럭셔리 속물 철부지 케릭터를 발굴했다는 측면에서는 큰 성과를 이뤘다는 것은 인정할만하다.

 

 

 

 

개츠비는 위대한가? 위대하지 아니한가?

 

 

    데이지는 사랑을 사랑한다. 사랑이 오고갈 때의 느낌과 기분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화려하고 럭셔리한 사랑이다. 그녀의 목소리엔 돈의 향기가 난다. 종이학 천 마리로는 그녀를 감동시킬 수 없다.

    개츠비는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사랑한다. 평균이상의 좋은 사람(Good Man)이고 보기 드문 순정남이다. 그는 유럽에서 공수한 자신의 이니셜이 수놓인 실크셔츠를 입고 핑크빛 수트도 넉넉히 소화해내는 폼생폼사, 스타일리스트다. 사랑에 있어선 완벽주의자고 아마도 일처리도 철저하고 용모도 한깔끔 할 것이다.

 

    데이지의 사랑이 철저히 수동적이라면 개츠비의 사랑은 철저히 능동적이다. 데이지가 사랑받는 것에 도취되어 있다면(난 좀 사랑스러운 듯 ^^) 개츠비는 사랑하는 것에 도취되어 있다.(난 좀 멋있는 듯 ^^)

    데이지는 개츠비가 아닌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아도 되었고 개츠비는 데이지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했어도 되었다. 데이지는 개츠비에게,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그녀) 아니면 아니 되는 유니크한 그 무엇이 없었다. 결국 그들의 인연은 운명적이라기 보단 우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데이지에게 사랑은 행복이다. 따라서 행복하지 않은 사랑은 사절이다. 괴로운 사랑, 아프고 시린 사랑, 가난하고 고달픈 사랑이 아닌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풍성한 사랑, 샹들리에처럼 화려하고 눈부신 사랑, 세상걱정 없고 책임질 일도 없는 어린아이가 누리는 들뜨고 재밌고 신나고 두근두근하는 사랑이다.

    개츠비에게 사랑은 미션이다. 따라서 어렵고 돈이 많이 들수록 해냈을 때 보람이 있다.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매일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데이지를 만나기로 한 날엔 잔디를 가지런히 깎아 놓으며 흥분한 데이지를 살피기 위해 그녀의 집 앞에서 꼬박 밤을 세운다.

 

    (남녀간의) 사랑에 굳이 등급을 매긴다면 개츠비의 사랑은 상위 0.1%에 속하는 최상위다. 데이지의 사랑은 하위 0.1%에 속하는 최하위다. 데이지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개츠비는 그런 데이지 때문에 죽게 되고 그녀에게 쓸쓸히 잊혀 진다.

    비유하자면 무림의 절대고수가 시장 좌판에서 삥뜯는 동네건달의 암수에 치명상을 입는 것, 고고한 성인군자가 산전수전 다 겪은 사기꾼 양아치에게 뒤통수 맞는 것,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간악한 바리새파 제사장들과 눈먼 대중에게 매맞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과 같다. 의도성, 적대적 관계만 제외한다면 '개츠비 & 데이지'와 비슷한 그림들이다.

 

    그런 데이지에게 그런 사랑을 바친 개츠비는 위대한가?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는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하는가? 돼지와 함께 빛이 바래지는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순정을 바친 개츠비는 그래서 더욱 위대한가? 아니면 그래서 결국 위대하지 아니한가?

    개츠비는 그런 데이지를 어느 정도 알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과연 영혼 깊숙이 서로 교류하였는지, 위대함을 넘어 숭고한 경지에 이른 가장 높은 수준의 사랑을 나누었는지 묻는다면 답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개츠비는 데이지가 자기 것을 버리고 그에게 돌아오지는 않으리라는 것, 결국은 그녀에게 버림받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역할, 미션, 임무, 사명이 주어지면 잘못된 신념, 믿음, 이념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존재다. 사랑이라고 다를 리 없다. 데이지가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면 개츠비는 마치 오직 데이지만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나고 살아온 사람 같다. 매몰차지만 데이지의 가치, 사랑의 가치를 떠나서 개츠비에겐 이런 자기확신, 자기만족의 혐의가 있다.

    왜 데이지만을 고집하는가? (내겐 매력없는 케릭터, 심지어 복창터지는 케릭터다.) 막말로 세상에 여자는 많다. 남녀간의 사랑 말고도 위대하고 숭고한 가치가 많다.

 

    작중 인물은 작가의 분신으로 애정이 남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감안한대도 개츠비 앞에 붙은 '위대한(Great)'이란 수식어는 개츠비가 걸친 핑크빛 수트처럼 다소 과장되고 겉멋 들린 느낌이 있다.

    상징과 은유의 문학적 표현에 작정하고 시시비비를 가릴 일은 아니지만 굳이 내 생각을 말하자면 개츠비는 위대하지 않다. 다만 그의 버림받은 순정이 애틋하고 불쌍할 따름이다.



    ※ 개츠비 & 데이지와 조지 & 머틀(자동차 수리점 부부), 개츠비와 조지, 데이지와 머틀은 유사점도 많고 대비점도 많다. 그들이 속한 세계가 다를 뿐 데이지도 머틀도 욕망에 충실하고, 개츠비도 조지도 사랑과 순정 때문에 죽게 된다. 이유만 다를 뿐 데이지도 머틀도 일상의 탈출을 꿈꾸며, 스타일만 다를 뿐 개츠비도 조지도 안쓰러울 정도로 한 여자에게 꽂혀있다.

    개츠비 & 데이지의 세계가 밝고 화려한 럭셔리한 총천연색 세계라면, 조지 & 머틀의 세계는 어둡고 칙칙하고 꾀죄죄한 무채색 세계다. 개츠비와 데이지가 잘사는 조지와 머틀이라면, 조지와 머틀은 못사는 개츠비와 데이지일 수 있다.

    억측이고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개츠비가 위대하다면 조지도 위대하다, 조지가 위대하지 않다면 개츠비도 위대하지 않다.



    ※ 개츠비가 위대하다는 다른 관점에서의 설명 혹은 변명


    개츠비의 '위대함'은 그가 인류에 공헌했다거나, 뭔가 엄청난 업적을 쌓았기 때문에 붙은 수식이 아니다. 그는 무가치한 존재를 무모하게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의연하게 그 실패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여전히 자신의 상상 속에 머문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위대하다. 따라서 그 위대함에는 씁쓸한 아이러니가 있으며 불가피한 자조의 기운이 스며 있다. - 237p 김영하 해설


    충분히 수긍이 가는 변호이지만 완전히 인정할 수는 없다. 위 문장에서 개츠비를 조지로 바꾼대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조명을 받지 않았을 뿐 위 설명은 조지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 그렇다면 개츠비와 조지는 도긴개긴인가? 본질에서는 같은가?


    만약 개츠비가 죽지 않았다면 데이지에게 계속 순정을 바쳤을까? 결국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비참하게 배신하더라도 여전히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기다렸을까? 아니면 사랑이 집착이 되고 집착이 증오로 바뀌어 폭력남 스토커의 소름끼치는 잔혹극으로 치달았을까?

    너무 나간 상상이지만 현실에서 남녀관계는 심심치 않게 극과 극을 달린다. 처음 좋을 때는 간도 쓸개도 빼줄 것같이 하지만 나중 나쁠 때는 재산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빼앗으려 한다. 하지만 개츠비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개츠비의 사랑은 본질에서는 밝고 긍정적인 사랑이지 절대 어둡고 파괴적인 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개츠비는 젠틀하게 물러나 끝끝내 독신으로 순정을 지켰거나 (플레이보이는 아니어서 쉽게 마음을 주지는 않겠지만) 다시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온 마음과 열정을 다했을 것이다.

    그렇다! 개츠비와 조지의 차별점은 여기에 있다. 상처받기를 두려워 않는 낭만. 상처받아도 다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열정. 다소 치기가 걷히지 않은 용감함. 세상은 선하고 친절할 것이라는 소년의 기대섞인 꿈. 삶과 사랑에 대한 희망. 긍정성... 이것들은 조지에게는 없고 개츠비에게만 있는 것이다. 개츠비는 소년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졸부로 그에게 물질은 부차적인 것이다.

    개츠비가 진정 위대하다면 이것 말고 달리 거론할 것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 겉멋도 아니고 곁가지도 아니다. 개츠비 성격의 가장 멋진 정수다. 이것은 체면이나 도덕적 올바름, 의무감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사랑, 억지로 사는 삶이 아닌 삶과 사랑을 추동하는 가장 능동적이고 원초적인 생의 에너지다.


    1만 마일 밖의 흔들림까지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그는 인생에서 희망을 감지하는 고도로 발달된 촉수를 갖고 있었다. (중략) 희망, 그 낭만적 인생관이야말로 그가 가진 탁월한 천부적 재능이었으며, 지금껏 그 누구도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성질의 것이었다. - 1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