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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or 대세....에 관한 소시민의 몇 가지 생각.

어멍 2009. 3. 20. 11:54

한국축구팀 VS 일본축구팀(강대강) : 당근! 오~ 필승 코리아!


한국 VS 중국(강대약) : 심정적으로야 항상 한국이 이겼음 하지만 가끔 중국을 응원할 때가 있다. 단순히 공한증을 갖고 있는 약자에 대한 동정심은 아니다. 유럽같이 높은 열기와 수준의 빅리그, 큰 시장이 활성화되려면 중국의 선전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가끔, 심심찮게 한국을 이기는 경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길게 봤을 때 한국의 축구선수, 축구종사자에게도 좋고 한국축구수준의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에베레스트는 히말라야에 있기 때문에 높다. 높은 산은 높은 산중에 있어야 더욱 높은 법이다.


북한 VS 일본(약대강) : 당근! 오~ 필승 (노스)코리아! 약자이기도 하려니와 아직은 우리편이라 느껴지니까. 당신이 일본을 응원한다면..... 당신은 일본인이거나 아니면 북한(정권)을 극도로 혐오하는 우익반공투사일 것이다.


브라질 VS 우간다(최강대최약) : 나도, 당신도 우간다를 응원할 것이다. 당신이 원래 브라질팀의 매니아, 열혈팬이 아니면서도 만약 브라질팀을 응원한다면 당신은 필경 승리만을 탐닉하고 강자만을 추종하는 영악한 탐욕의 유전자를 타고났을 것이다.


우간다 VS 모잠비크(최약대최약) :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두 나라. 억지로 봐야만 한다면 흥미를 위해서라도 지거나 밀리고 있는 팀을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 VS 우간다(강대최약) : 처참하게 깔아뭉개지만 않는 한은 한국을 응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간다는 너무 멀고 무엇보다 한국은 우리편이니까.

 


  왜 우리는 항상 승부의 세계에서 자연스레 약자를 응원하게 될까? 동정심, 때론 약자인 내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해서겠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본래 내재된 억강부약(抑强扶弱)하려는 천성의 발로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아무 이해나 관계없이 일시적으로 발현되는 이러한 본성이 이해나 내편네편식의 관계가 개입되고 지속적이어야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만년 꼴찌 약체팀을 일년내내 응원하기는 재미없고 지치는 일이다. 더욱이 그 팀의 일원이 되라면 응원팀이 졸지에 기피팀이 되기가 십상이다.


  약자, 약팀을 응원하면서도 강자, 강팀에 속하고 싶은 욕망! 인간은 자기 안에 이 모순되고 상반된 두 가지 본성을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동시에 갖고 있다.

  전자가 억강부약하려는 정의, 대의라면 후자는 억약부강하려는 욕망, 대세라 할 수 있겠다. 멀게는 전자는 성선설, 주리론. 후자는 성악설, 주기론과도 닿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따라서 성악설, 성선설 모두 옳다는 것이 또한 내 생각이다.


                                                           대세, 줄세우기의 강력한 일사불란함
                             -자연계에선 물리적 현상이지만 인간에겐 욕망과 생존술의 형태로 나타난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란 말만큼 대세론, 줄세우기를 잘 표현한 말은 없다. 그것은 적극적, 공격적으로 이득을 취하려거나 소극적, 방어적으로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상류, 주류를 선망하며 거기에 속하고픈 신분상승심리, 소외와 왕따를 피하고 싶은 소박한 바램까지 그 형태도 다양하다.

  간혹 약육강식, 강한 것이 곧 정의라는 신념하에 거짓․배신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세만을 쫓는 것이 생존술로 철저히 내면화된 이도 있지만 이러한 대세론은 통계치보다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답하는 비율이 높게 나온다거나, 고소득층의 세금중과에 대해 정작 중산층의 반대비율이 고소득층보다 높게 나오는 현상, 뚜렷한 정치적 주관없이 될 놈 밀어주자는 식의 사표방지심리등과 같이 무의식적이고 소박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사회․경제․정치적 불일치․모순 심지어 자기배반․계급배반의 기저에는 비주류(minor)보다 주류(major)에 속하고픈 욕망과 소수약자로 내몰리지 않으려는 두려움이 뒤범벅된 소극적 대세론의 심리가 무의식적으로 내재돼 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주의, “빨갱이”보다 무섭다는 “빨갱이로 몰리는 것”, 상류층 소비문화를 선망하고 거기에 속하고 싶은 물신주의(物神主義), 욕망의 투사는 스스로 사회경제적 주제파악, 정치적 각성을 방해하는 중요 장애물이다.

  그리고 우리 주위는 이러한 대세론을 유포, 증폭하는 것으로 넘쳐난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작은 사진에서 왠지 강력한 포스가....)

부러운가. 얄미운가. 아니면........두려운가.
무릇 보통 사람은 자기보다 열 배의 부자에 대해서는 욕을 하고, 백 배가 되면 무서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 심부름을 하려 하고, 만 배가 되면 그 사람의 노예가 되려 한다.-《사기》



  바람이 분다. 신문에, TV에, 옆집에서도 불고, 친구, 친척, 광고, 전단지, 학교, 교회, 직장에서도 바람이 거세서 중심을 잡고 서 있기가 힘들다.

  이명박이 한나라당이 대세고, 미국, 조기유학, 세컨드카, 해외여행, 영어, 조중동.... 과외 한두개 받는 게 대세고 웬만한 명품 하나쯤 걸치거나 들고 다니는 게 대세고 그래야 웬만큼 체면이 선다.

  부자되세요, 성공하세요, 좌파, 빨갱이, 데모꾼, 떳떳한 성형미인들과 공공연한 무슨무슨 라인들, 신상녀.... 어지럽다.

  이 어지러운 바람의 중심, 태풍의 핵에는 TV, 신문으로 대표되는 미디어, 언론이 있다. 이 바람은 때론 무자비하게 세차지만 때론 훈풍처럼 은밀하고도 교묘하다.


  신문은 강자, 부자의 선행, 미담으로 약자, 평범한 이들의 칠전팔기, 성공담(결코 평범하지 않은 기적같은, 드라마틱한 성공담)으로 넘쳐난다.

  TV연속극속의 부자, 강자는 항상 너그럽고 가끔 보이는 세속적 흠조차 인간적이어서 오히려 정답게 느껴지며 빈자, 약자는 항상 순박하고 착하며 부지런하고 절대 좌절하지 않으며 결코 부자, 강자에 대해 경제적․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거나 한을 품지 않는다.

  어른, 어르신들이 이러한 연속극을 보며 때론 웃고 때론 울고 죽일 놈, 살릴 놈하며 감정이입하듯 청소년들은 연예가 중계, 우결, 패떳등의 연예오락프로를 보며 스타의 소비성향, 라이프스타일, 사생활, 농담 한마디, 자막 한줄에도 환호하거나 분개한다.

  똑같은 과도한 잘못된 감정이입이라도 악역배우를 뒤에서 후려쳤던 어르신이나, “우리 오빠”를 마치 “친오빠”인양 옹호․열광하는 어린 오빠부대는 그나마 우스운 에피소드나 한 때의 청소년 문화로 치부할 수야 있겠지만 지역․이념에 얽매여서 마치 당원이나 직업정치인이나 된 양 스스로의 경제․정치적 계급을 배반하여 모 정당에 맹목적 애정과 지지를 보내는 경우는 참으로 보기에 안타깝다.

  비록 억강부약, 대의를 따르진 않더라도 누가 내편이고 누가 저편인지, 내 위치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 주제파악이라도 제대로 하자는 말이다.

 누구는 한국사회의 과도한 지역적, 이념적, 계급적 갈등을 걱정하지만 문제의 본질, 근원은 갈등 그 자체보다 갈등구조의 불합리성이다. 갈등이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합리적인 갈등을 전제로 한 제대로 된 해결을 도모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근원적인 문제는 갈등의 과잉보다 대개 강자의 독점, 약자의 파편화, 강자의 탐욕, 약자의 무지로 인한 갈등의 미봉, 축적(에 따른 폭발)으로 정리할 수 있다.


                           KBS일일연속극 “너는 내 운명”-씩씩한 새벽이. 너그러운 사장님. 웃긴 사모님.



  물론 신문, 뉴스, 시사, 교양, 토론외의 드라마, 연예, 오락에서까지 무슨 진지한 교훈이나 비판정신을 찾는 것은 삭막하고 피곤하고 진부한 것일 수도 있고 웃자고 만든 프로를 죽자고 덤벼들어 해부․비판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또한 영화 <공공의 적>, <화려한 휴가>, <파업전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말콤X>, <화씨911>등이 다루는 주제를 안방극장에서, 그것도 매일연속극으로 다루기엔 적합지 않고 어쩌면 사회체제 유지에 잠재적 위해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것들대로 휴식, 오락, 체제안정등의 효용과 역할이 있다. 어쩌면 바쁘고 치열한 경쟁에 지친 현대인들의 고단한 삶에서 이러한 작은 휴식, 꿈마저 빼앗는다는 것이 오히려 더욱 가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균형인데, 더욱 거세지는 대량소비문화의 자본주의 광풍과 보수로의 정권교체까지 맞물려 그 균형이 급속히 기울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KBS시사투나잇, 미디어포커스등의 시사비판프로의 폐지와 토론프로의 심야편성 및 축소, 뉴스를 포함한 모든 프로의 연성화의 현상에서 보듯이 미디어, 언론이 5공식 3S(스크린,섹스,스포츠)정책처럼 우민, 중우정책의 일환으로 기득권층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 영속화하는 도구로 쓰인다면 빵을 빼앗고 헛된 꿈만을 주는 우리를 길들이는 매트릭스, 우리의 사고․비판정신․정치의식을 무디게 하는 달콤하고 편안하고 나른한 매트릭스일 뿐이다.


  리얼상황극을 표방한 반쯤은 리얼하고 반쯤은 꾸며낸 듯한 연예프로가 대세․주류가 되었고 시청자 역시 어디까지가 리얼한 것인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몰입하고 열광한다.

  만약 당신이 이런 프로에 열광하는 10대 독자라면 철학적․도덕적․정치적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빨간 알약을 권하기 위해 주머니를 꺼내기도 전에, 당신에게 돌아올 대답은 “됐거든(요)”라는 귀찮고 피곤한 외마디 반응이 다일 것이다.(뻘쭘해진 우리의 모피어스!! ㅠ.ㅠ)


                                                                         Red Pill or Blue Pill
                       -빨간 알약을 선택하고 또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선 강하고 견고한 용기가 필요하다-



  실제로도 진실․대의란 때론 가혹하고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도, 함부로 권할 수도 없는 위험한 빨간 알약이다.

  누구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비공식 뒷담화로 한발 물러서기도 했지만, 때론 스스로 독배를 마시기도 했고, 때론 하여가의 회유를 뿌리치고 단심가를 부르며 선죽교에 피를 뿌리기도 했다. 이렇듯 동서고금에 진실․대의의 길이란 목숨까지도 걸어야 했던 좁고 험한 가시밭길이었다.


                                    김용철 변호사-의리, 인간적 도리 운운하며 배신을 말하기 전에
                        스스로 대세, 거악에 맞서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에는 이의를 달수 없을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들었다는 “뒷골목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을 것”이라는 협박이 결코 허언은 아닌 것이다.

  체게바라는 볼리비아의 어느 산골 이름 모를 학교교실에 감금된 채 재판도 없이 처형을 당했으며, 아옌데 대통령은 비행기 탈출을 제의한 쿠데타군의 호의(?)를 뿌리치고 경호원들을 모두 내보낸 채 대통령궁에 홀로 남아 소총 한자루만을 들고 끝까지 저항하다 결국 최후를 맞았다.


                                                               Salvador Allende 칠레대통령
                         -그의 사후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1주일간 약 3만명의 시민이 학살당한다-



  소시민인 필부필부에게 이런 극한상황을 설정하기에는 무리가 많지만 현대인들은 크고 작은 대세․대의의 갈등의 기로에서 알게 모르게 대세의 유혹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시대의 조류에 발맞추어 어우렁더우렁 섞여 살며 때론 타협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유혹에 맞서 중심을 잡으려면 목숨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소수로 몰리는 것, 끝끝내 홀로 남겨지는 것마저 감수할 수 있는 각성과 용기가 필요하다.


  당신은 어떠한가? 항상 바쁘고 성실히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도 소외와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운가?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면서도 TV와 쇼, 오락프로에서 휴식과 위안을 얻고 있는가? 부동산에 자꾸 군불을 때고, 개발과 삽질에 일로매진하는 이명박정권을 준엄하게 비판하면서도 화장실에선 동네 아파트 시세표를 초조하게 들여다보고 계신가?

  이미 우리의 꿈은 한가지, 모두 747과 같이 숫자로 치환될 수 있는 한가지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단지 금액의 많고 적음에 따라 큰 꿈, 작은 꿈, 호쾌한 꿈, 소박한 꿈으로 나뉠 뿐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자본의 매트릭스에 포위된 슬프고도 소박한(!) 우리네 자화상이다. 우리는 매트릭스의 포로를 넘어 이미 그 자체의 일부분, 구성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가 구성원 모두에게 물질적 풍요, 정신적 행복을 가져다주는 유토피아는 아니다. 누구는 생계유지, 누구는 품위유지, 누구는 사치유지를 위하여 저마다 힘겹게 무한경쟁하는 정글의 모습에 오히려 더 가깝다.
  
 

  스코트 니어링처럼 야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물질문명을 스스로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의식주를 자급자족하는 독립경제를 이룰 수 있겠는가? 게바라처럼 무장혁명투쟁은 아니더라도 사회변혁운동에 헌신할 수 있겠는가?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호랑이 등에 올라타, 갖가지 인간관계로 얽혀져있는 현대의 소시민들에겐 감히 흉내조차 내기 힘든 범상치 않은 인물들의 범상치 않은 삶의 방식일 것이다. 이미 현대인들에겐 꿈과 이상을 떠나,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살아남는 것이 시급한 관심사가 된지 오래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남아 자기 몸을 보존할 것인가.


               시장에서 무시래기를 팔며 하루 2,3만원 벌이로 생계를 이어가시는 이름만 부자인 박부자 할머니
                                               이명박 대통령이 잘 되길 바라며 기도하신다는 할머니.
                        "우리도 힘든데 대통령은 얼마나 더 힘들겠느냐"며 되레 대통령을 위로하는 할머니.
                           할머니는 과연 강자, 부자의 품에서 위안과 행복을 얻고 삶을 보존할 수 있을까.



  게바라의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항상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라는 말을 빌리자면 그와 같은 원대하고 위대한 꿈, 이상적인 꿈은 아니더라도 허황된 꿈, 적어도 매트릭스에 의해 주워진 거짓 꿈을 꾸지 않으려면 리얼리스트라도 돼야 한다. 위대한 아이디얼리스트가 아니라면 소박한 리얼리스트라도 돼야 한다. “꿈★은 이루어진다”지만 허상과 이미지에 홀려 멍때리는 몽(夢)한 인간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이것이 매트릭스에 먹히지 않고, 휘둘리지 않고 정신없이 빠르고 각박하게 돌아가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소시민의 생존술이다.


  친구따라 장에 가면 안 된다. 뭣 모르고 허둥지둥 줄서서는 안 된다. 우~ 몰려다녀서는 안 된다. 스스로의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서야 한다.

  관리되지 말기다. 길들여지지 않기다. 새장속의 새는 더 이상 새가 아니고, 우리속의 호랑이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다. 외롭고 두렵더라도 하늘을 날고 벌판을 뛰어다녀야 한다. 눈멀고 나약한 군중이 아니라, 깨어있는 강한 개인이어야 한다.

  도덕적인 존엄한 인간으로 서려면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지어다”[출애굽기 23:2]

  현명한 생활인으로 삶을 도모하려면 “다수를 따라 어리석음을 행하지 말지어다”



                                        바람이 세찬 벌판에 서 있으려면 뿌리가 깊고 단단해야 한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나도 욕망이 있는 속된 인간인지라 흔들린다. 하지만......


  부러우면 지는 거다.

  얄미워도 지는 거다.

  오직 당당함만이 이기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