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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최고 형태, 행복의 최고 형태

어멍 2010. 5. 26. 00:50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대개의 경우 신영복님의 말이 맞다. 거기서 그치고 거기에 다다르기만 해도 대성공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뭔가 부족하다. 완전함을 추구한다면 부족한 2%는 단순한 수치, 2/100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화룡점정! 그것이 채워져야만 날아오를 수 있다. 완전함에 도달한다. 하나가 완성된다. 부족한 2%는 일부분이 아니고 전체이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당연한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머리는 지능, 학습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부정적으로는 속된 말로 눈치보기, 잔머리까지 포함할 것이다. 뒤에 나오는 관찰과 짝을 이룬다.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다.” 내가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구절. 그 마음을 어떻게 규정하고 어떤 면을 강조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얘기가 틀려지겠지만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마음은 뒤에 나오는 애정과 짝을 이루고 있다. 손은 실천적 연대와 짝을 이루고 있다. 즉 속 마음은 ‘실천’을 담보한 손보다 못하다는 거다. ‘(니 마음 다 아는) 내 마음 알지?’라는 헛소리는 필요없다는 거다.

    마음을 단순히 감정, 욕망, 속뜻, 관념이나 실천 없는 값싼 동정심 정도로 바라본다면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옛말에 ‘손이 마음보다 부지런하다’란 말도 이 취지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애정, 사랑, 더 나아가 각성과 깨달음으로까지 규정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마음이란 것의 정수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 측은지심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타인의 아픔에 같이 아픔을 느끼는 감수성이다. 누구는 지구 반대편의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타인의 아픔에 같이 아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누구는 이웃의 억울한 죽음, 참혹한 시체 옆에서 게걸스레 빵을 먹기도 한다. 이런 마음, 사랑, 감수성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보편적으로, 더 결정적으로 우리의 태도와 삶을 결정짓는다. 원래 마음 가지 않는 곳엔 손도 가지 않는 법이다.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다.” 발은 입장의 동일함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이 말도 이론의 여지가 없이 맞다. 어디에 서 있느냐, 무엇을 디디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을 평가, 파악함에 있어 당장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보여주는 가보다 무슨 길을 걸어왔는지, 그의 발자취가 더 중요하다. 아무리 지지와 동정의 말과 몸짓을 보여주더라도 묵묵히 내 옆에 서 있는 것만 못하다.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나불거리더라도 어깨를 걸고 같은 땅을 딛고 비를 같이 맞아주는 것만 못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떤가. 실천적 연대는 고사하고 같은 입장에 있는 이마저도 같이 비를 맞으려 하지 않는다. 연대는 끊어지고 개인은 파편화되어 벌판에서 외로이 비를 맞고 있다. 같이 서 있어야 할 동료는 옆에 없다. 심지어 집단으로 벌판에 내몰려 거센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각자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 자신이 딛은 발밑의 땅을 자각치 못한다. 벗어나고만 싶다. 마음이 땅을 저주하고 발을 배반한다. 자기집 텃밭은 돌볼 생각않고 졸부집 담장넘어 곳간만을 부러워한다. 결국은...다시...마음이다.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머리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하고,

발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입장의 동일함보다는 애정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상이함을 뛰어넘는 이해와 사랑이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어멍의 생각

 


    관계란 아(我)와 비아(非我), A와 B의 존재를 전재로 한다. 나와 나의 관계, 너와 너의 관계, A와 A의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넌센스다. 같음, 하나됨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동일(同一), 통일(統一), 합일(合一), 획일(劃一), 전일(全一), 그 느낌과 뜻이 다 다르다.

    과연 입장이 같아져야만 관계가 개선될까? 입장이 다른 상태에서도 서로 소통하고 관계가 깊어질 수는 없는 걸까? 같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과연 완전한 하나됨이 정녕 가능하기는 한 걸까? 당위성과 가능성을 따져보자.

    구지 같을 필요는 없다. 구지 억지로 합할 필요는 없다. 구지 획일과 구속을 지양하고 다양성과 자유를 지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존재는 그 자체로 각자 고유한 자리와 역할, 개성이 있다. 총을 들고 전장에 설 수도 있지만 카메라를 들고 전장에 나설 수도 있다. 전투에서 지고 있다고 그에게 총을 쥐라고 할 수 없다. 죽어가는 동료의 얼굴에 카메라를 대고 마지막 숨을 찍어댄다고 한가하거나 잔인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때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관찰자’, '무정한 기록자'도 필요하다. 그 역시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다. 그에겐 단순한 관찰, 기록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실천이며 소명이며 애정이다.

    다음은 가능성. 단순한 소통과 공유가 아니라 완전한 입장의 일치, 시공간적인 완전한 합일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내 결론은 ‘아니다.’ 들어갈 때 틀리고 나올 때 틀리다. 한 치 거쳐 두 치라고 완전한 입장의 일치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다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부터가 입장이 다르고 어긋나기 시작한다. A와 A'라는 이름으로 구별하기 시작하면서 입장이 나뉜다. ‘(완전히) 같은 둘’, ‘다른 하나’는 '왼쪽으로 우회전', '하얀 검정', '네모난 세모', '미래의 기억'처럼 논리적으로 명백한 형용모순이다.

    완전한 하나됨은 아무리 완전한 마음, 고상하고 위대한 마음을 지니고 있더라도 시간적, 공간적,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매번 광장에 나가서 촛불을 함께 들 수도 없고 고공크레인에 함께 올라 서 있을 수도 없으며 지구 반대편의 고통에 비행기를 타고 가 함께 있어줄 수도 없다. 당장, 눈앞의 친구, 연인과도 일체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소통하기조차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전략적으로도 입장(의 동일함)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여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비슷한 입장의 동료에게든 다른 입장의 상대에게든 딛은 땅을 각성하라며 발을 묶어두기 보다는 마음을 얻고 가치에 호소하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다.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되겠지만 서로 다른 입장, 조금이라도 다를 수밖에 없는 입장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오히려 더 성숙한 태도이다. 감수성, 공감할 수 있는 능력으로 그 심성을 대략 가늠할 수 있다면 역지사지하는 능력,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 자신의 귀에 거슬리는 쓴소리를 달게 받아들이는 능력으로 그 인격의 성숙도를 파악할 수 있다.


    입장에 따라 처지가 틀리고 역할이 틀리다. “아빠는 직장에서, 엄마는 가정에서, 나는 학교에서 각자 주어진 일을 잘 해야겠따!!” - 역할론이다. 초등학교 글짓기 결론부에 주구장창 써 먹던 관용문이다. 주제가 무엇이든, 어떤 글이든 웬만해선 어색하지 않고 무난하다. 각자 주어진 입장에서 각자 해야 할 역할을 한다면 사회 역시 무난할 것이다.

    도둑놈은 도둑놈, 경찰은 경찰, 약탈자는 약탈자, 희생자는 희생자의 역할을 하는 거다. 어차피 각자 이익을 쫓는 사회! 사회가 이익집단화될 수밖에 없다면 각자 밥그릇 챙길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하면 자연스레 균형을 찾아 갈 수도 있다. 지금은? 강자의 권리는 과잉보호받고 있고 약자의 권리는 과잉제약되고 있다. 경찰이 도둑놈 역할을 하고 있고 종부세 걱정없는 서민들이 부동산 재벌가들의 권리, 밥그릇을 챙겨주고 있다. 각자 제 역할조차 못하고 있다.

    각자 자기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자기 권리를 떳떳이 주장할 수만 있어도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합리적인 사회가 될 수는 있다.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하지만 심심하다. 재미가 없다. 부자따로, 서민따로다. 양반따로 상놈따로와 별반 다르지 않다. Don't touch me! 자칫 세상이 무미건조, 삭막해질 수 있다. 부자와 서민이 우정을 나누고 양반자제, 상놈자제 함께 어울려 뛰어노는 흥겹고 감동적인 대동(大同)사회는 아니다. 관용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관용과 이해가 활발히 통용되는 이상적인 사회상인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아니다. 너무 먼 일일까. 너무 큰 과욕일까.




화이부동 : 따로 똑같이. 평화롭고 조화로운 다양성 속의 통합



    대동을 위해선 자기 위치, 자기 역할을 배반하지 않되 거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부자의 거들먹거림, 빈자의 주눅들음을 벗어던지고 인간 대 인간으로 교류해야 한다. 입장과 조건을 뛰어넘어 진정한 친구, 연인, 스승을 찾아나서야 한다. 역사를 봐도 이런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나라와 나라를 달리해 싸우면서도 우정을 나누고 신분과 연령을 초월하여 배움을 구하고 살벌한 정쟁을 일삼으면서도 서로를 존경하며 신의를 주고받곤 했다.

    관계를 결정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현재의 입장보다는 후천적 교육과 선천적 품성인 경우가 의외로 많다. 한마디로 서로 죽이 맞아야 한다. 눈이 맞아야 한다. 왕자와 거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사랑엔 신분도 없고 국경도 없다. 이런 경우가 오히려 결속력이 강하고 관계의 밀도가 높다. 이득을 매개로 모이고 때론 비리를 함께 모의했다는 공범자 의식으로 똘똘 뭉치기도 하지만 대의와 가치를 매개로 모이고 성향과 코드가 맞아 앞뒤 안 재고 의기투합하는 연대, 세속적 조건들을 초월하여 상대에게 빠져드는 열병과도 같은 사랑도 강고하다. 입장만을 강조하고 거기에 따라 저마다의 작은 이익만을 고집하면 편협한 우물 안에 빠질 수 있다. 자칫 역할놀이나 계급적 유물론의 한계에 갇혀 발이 묶이게 될 위험이 있다.

    단, 외출놀이도 경계해야 한다. 생소한 것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순간적인 끌림에 잠시잠깐 혹해서 반나절 나들이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진심을 주었던 상대방, 영원을 함께 하리라 믿었던 상대방은 크게 상처받는다. 때론 왕자가 상처받기도 하고 때론 거지가 상처받기도 한다. 간혹 반나절의 나들이가 운명적 만남으로 이어져 하루, 이틀, 일년, 이년, 일생을 좌우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지 않다. 입장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더욱 빛나고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행복의 최고 형태는 관계의 최고 형태에서 나온다. 귀족 자제가 귀족 자제와 친구가 되고 재벌자제가 함께 놀던 재벌자제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안온한 일생을 보낼 수도 있다. 일반적이고 달리 흠잡을 데 없고 대개가 부러워하는 관계다. 하지만 이것이 최고 관계, 최고 행복인지는 의문이다.

    당신은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될 수 없는, 온전히 당신일 수 있는 오직 한사람.

    나는 당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될 수 없는, 온전히 나일 수 있는 오직 한사람.

    당신이 내가 아님이, 내가 당신이 아님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으로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교감, 소통을 통한 가장 차원 높은 행복의 형태인 확장, 상승을 동반한 일체감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서로 다름을 전재로 한다.(다르다는 것은 다양성의 개념! 틀리다는 것은 정오(正誤)의 개념! 그르다는 것은 선악의 개념!) 둘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다시 둘이 되는, 수천 수만 모두가 하나가 되고 다시 하나가 모두가 되는 완벽한 충만감과 자유로움이야말로 행복의 최고 형태다. 그리고 이런 관계의 밀도, 행복의 일체감은 서로 다르면 다를수록 서로 멀리 떨어져 위치에너지가 크면 클수록 증폭된다. 어떤 때는 아름답고 황홀한 불꽃을 튀기며 폭발하기도 한다. 인간세상에 위대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똑같은 모양의 산, 똑같은 깊이의 강은 심심하다. 재미가 없다. 나와 완전히 같다면 구지 사귈 이유가 없다. 매력이 떨어진다. 매트릭스를 장악한 스미스들처럼 대통령도 나의 분신, 재벌도 나의 분신, 직장 상사도 나의 분신, 배우자도 나의 분신이라면...... 평소 욕했던 상대들이 모두 나라면 욕은 줄겠지만 너무 심심하다. 너무 고독하다.



    정리하자. 충청도에 살면서 행복시를 지지하기는 쉽다. 노동자이면서 노동삼권을 주장하긴 쉽다. 서울 한복판 몇 십억 아파트에 살면서 행복시를 찬성하는 자가 진정한 균형발전론자라 할 수 있다. 사용자이면서 국내외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옹호, 주장하는 자가 만민평등주의자라 할 수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관계의 최고 형태! 행복의 최고 형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지레 포기하진 말자. 미리 그들, 나와 입장이 확연히 다른 그들이 자신의 올곧은 신념, 옳다고 여기는 가치, 인간본성의 가장 아름답고 보편적인 모습을 표시할 기회를 그들로부터 빼앗진 말자. 그것이 비록 이건희 삼성회장이 용산참사에 눈물짓고,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의 자결에 용서를 구하는 진심어린 참회의 눈물을 보이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우리에겐 그들의 그러한 권리, 일말의 가능성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




다정다감하여 탁월한 소통능력을 지닌 친근한 카리스마! - 필요할 때 웃고, 필요할 때 운다.




    강남에 살며 행복시를 찬성하는 자가 진정한 내 동지다.

    수천억 재벌이면서도 용산참사에 눈물을 흘리는 자가 진정한 내 동료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굶어 죽을지언정 땅에 떨어진 음식은 먹지 않는 자가 진정한 나의 친구다.


    악과 거짓도 진부하고 평범하지만 선과 진리 역시 진부하고 평범하다.

    마음이다. 사람의 됨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