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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멋진 신세계> <1984> 그리고 <죽도록 즐기기>

어멍 2015. 1. 17. 23:11


    <우리들> <멋진 신세계> <1984> 그리고 <죽도록 즐기기>





    <우리들(My)>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Evgenii Ivanovich Zamiatin) 1920년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932년

    <1984>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48년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 닐 포스트먼(Neil Postman) 1985년

 


    탈고, 발행된 순으로 나열된 위 네 권 중 앞의 세 권은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이고 마지막은 미디어 매체 비평서다. 모두 세상을 떠난 작가들의 전세기(前世紀) 작품이지만 훌륭한 작품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지금 오늘날, 바로 여기까지 유의미하게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아직도 많은 부분 다가올 어두운 미래를 예고, 경고하고 있다.

    왜, 하필이면 어두운 디스토피아 소설인가? 현재에 비추어 경계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예전에 이미 <1984>를 읽은 김에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을 내쳐 읽기 위함이다. (내쳐 읽은 김에 내쳐 뭉뚱그려 정리, 포스팅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마치 신문과 TV로 북한의 어둡고 엽기적인 온갖 비참하고 흉한 모습을 보여주면 대(大)한민국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해지는 것처럼... (우리는 행복한 겁니다. 아~ 행복하다! 새누리당은 훌륭한 겁니다. 아~ 훌륭하다!)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짓거리인가!” - <멋진 신세계> 234p

    새누리당이 옳다는 사실을 모르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짓거리인가!

 


    허기사 행복해지려면 기대감을 대폭 낮추고 시야를 싹뚝 잘라버리면 된다. 공간적으로는 아래만 보고 시간적으로는 과거만을 본다. 나보다 못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먹고 살만한가!

    부자, 권력자들은 미워해야 할 사람이 아닌 존경해야 할 사람들. 언감생심 시기와 질투로 이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은 소설 속의 독재국가나 북한과 비교해야지 절대 복지와 인권이 함께하는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국가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분수에 맞지 않게 간땡이가 부어서 즐거움과 존엄이 함께하는 눈물나게 행복하고 정의로운 미래를 꿈꾸어선 안 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아래든 과거든 일체의 비교, 일체의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면 머리만 아플 뿐! 오직 여기, 오직 현재만을 본다. 마약에 헤롱헤롱 꿈속, 그 순간만큼은 영원할 것 같은 꿈속을 거닐고 있는데 위아래가 어디 있고, 과거와 미래가 어디 있을 손가! “뿌리도, 결실의 과일도 소멸되고 오직 현재의 꽃만이 장밋빛으로 피어난다.” - <멋진 신세계> 140p

    과거보다 객관적 삶은 더욱 열악해졌지만 과거보다 주관적으로 행복하다는 답변이 많아진, 얻을 수 없는 것들은 아예 원하지를 않게 됐다는 일본의 젊은 ‘사토리(さとり) 세대’ 즉 ‘득도(得道) 세대’다. 어제 벌은 일당으로 컵라면을 먹으며 PC방을 전전해도 행복하다는, 절망함으로서 행복으로 도피해버린 21세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다.

    이런 일본 젊은이들에 비해 한국 젊은이들은 아직 살 만 해서일까? 삶의 고단함이 주는 득도의 경지에는 아직 오르지 않았다. 더 세속적이고 더 동물적이며 더 욕구불만에 차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아직 희망이 있다. 불만이 없으면 불행도 없지만 진보도 성장도 없다. 우리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 채워져 있어야 할 무언가가 빠져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 삶은 더욱 충만해지고 충실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 불행과 불만은 진보와 희망의 다른 이름, 행복과 만족은 퇴보와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

 


    나에게 불만이 많아서일까? 희망이 많아서일까? 한국사회와 새누리당 정권에 과도하게 인색해서일까? 과도하게 기대가 많아서일까?... 요사이 아무리 자기암시, 정신승리를 동원해 (상대적) 행복감을 느끼려 해도 현실이 마냥 해피하지가 않다. 내 한 몸 배부르고 따뜻해도, 거실에서 소설을 읽으며 여가를 즐겨도 광장에 나가 뉴스와 풍문을 들으면 내일 당장 나와 내 가족에게도 흉한 일이 닥치고 말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불쾌하고 자괴감이 들 정도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위에서 아래까지 사회가 흉흉하고 바람 잘 날이 없다. ‘나만 아니면 돼’ 문을 쳐 닫고 있기엔 내가 숨숴야 할 사회적 공기가 너무 탁하고 고약하다. 쏟아지는 북한 뉴스도 꿀벅지를 들이대는 걸그룹의 춤과 노래도 위로가 되지 못한다. - 어쩌면 이렇듯 내 걱정과 예상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지... ㅠ.ㅠ 업종을 전환해 돗자리를 깔고 점집을 차려도 먹고 살지 싶다. (관련포스팅 ☞ 18대 대통령 선거결과 분석 및 평가)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인가? 괴롭지는 않더라도 무언가 잘못돼가고 있다고 느낀다면 결국은 극복하거나 도피하거나, 각성하거나 오히려 더 취하거나 둘 중 하나다. 바로 소마(Soma) -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먹으면 행복해지는 약물 - 에 취해 모두가 행복해하는 ‘멋진 신세계’로의 도피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며 진정한 행복은 더더욱 아니다.

    문제의 해결책? 진정한 행복? - 은 무엇인가? 세 소설을 보면 해답의 단서가 나온다. 내 판단으로는 바로 ‘존엄’이다. 행복이란 말초적, 감각적 쾌락도 아니고 단순히 ‘살아 있는’(개인에겐 생명유지, 집단에겐 체제유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세 소설에는 쾌락만 있다. 개인들은 살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듯하고 사회는 체제유지에 그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듯하다. 그곳에는 모두 존엄이 없다. 어디에도 없다. 존엄 있는 인간도 없고 존엄 있는 참다운 행복도 없다.

 


    세 소설은 디스토피아 소설답게 모두 어두운 분위기로 전개되며 결말 역시 주인공들의 죽음이나 패배로 비극적으로 끝난다. 그 중 <1984>가 가장 어둡고 <멋진 신세계>가 가장 덜 어둡다. <우리들> 역시 어둡기는 마찬가지지만 애매하고 흐릿한 분위기가 어두움을 압도하여 읽기에 가장 어렵고 지루했다. 극적 구성은 <1984>가 가장 재밌고 그 다음이 <멋진 신세계>, <우리들> 순이다.

    세 소설의 유사성과 차이점 등을 비교하며 자세히 리뷰하기에는 글이 너무 길어지고 내 능력 밖이기도 하여 생략하기로 한다. 단, 전 작품이 이후 작품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므로 독자는 가급적 발행 순서대로 읽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개략적으로 <우리들>은 <1984>에 많은 영향, <멋진 신세계>에 적은 영향을 주었고 <죽도록 즐기기>는 <1984>와 <멋진 신세계>의 암울한 미래상을 1980년대 초기 미국의 미디어 환경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시대상에 대입, 비교하며 <멋진 신세계>쪽의 가능성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단순화하자면 <우리들>과 <1984>의 세계가 한 편에 <멋진 신세계>와 <죽도록 즐기기>의 세계가 다른 한 편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내 생각은? 역시 닐 포스트먼의 주장대로 <멋진 신세계>쪽이다. 미래에는(아니면 이미 벌써) 감시, 통제, 압제, 폭력 같은 우리가 무서워하고 증오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TV, 휴대폰, 게임기, 인터넷 같은 우리가 즐기고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를 망칠 확률이 더 크다.

 


    이상향(理想鄕)을 뜻하는 유토피아의 어원은 ‘어디에도 없는’의 의미다. 디스토피아가 유토피아에서 파생된 반대어라면 그 뜻은 ‘어딘가에는(혹은 언젠가는) 있을 법한’의 의미가 될 것이다. 실재로 세 소설 속에 힌트, 아이디어 수준으로만 나왔던 테크놀로지, 통치수단 등이 SF 영화에서 차용되는 것을 넘어 현실에서 이미 실현되었거나 실현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다. 이것이 이 소설들이 단순한 재미 위주의 읽을거리가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우리가 그들의 경고를 가벼이 흘려듣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 경고에 무엇으로 응답할 것인가? <1984>와 <멋진 신세계>의 악한 권력, 나쁜 체제에 저항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바라는 대로 - 보여주는 대로 보고, 들려주는 대로 듣고, 주는 대로 먹고, 하라는 대로 하는 - 감각적 소비만 있고 능동적 사고의 각성이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오직 분수에 벗어나지 않게 스스로 만족함을 알고 감사할 수 있는 겸손과 온순함, 아울러 어떠한 억압과 통제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을 굴러가게 하는 망각과 무지만이 최고의 미덕인 사회다. 빅브라더에 의해 조종되고 사육되는 사회, 결국은 길들여져 존엄을 반납하고 쾌락만을 쫓는 사회다.

 

    오직 일방적인 폭주와 폭력, 교묘한 통제와 거짓 평화, 굴종적인 침묵과 말초적 쾌락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점점 도전하고 저항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결국에는 생각하고 의문을 품고 물을 수 있는 능력마저도 거세당하고 있다. 시민 위에 군림하여 통치하려는 지배자들이 꿈꾸는 유토피아, 즐겁게 뛰놀다가 조용히 죽어가는 온순한 양떼들만 사는 ‘멋진 신세계’다. 그들의 유토피아는 곧 인간, 인류에게 디스토피아인 것이다.



    세 작품 속에는 많은 도치법, 역설법, 반어법이 쓰이고 있어서 읽는 내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깊고 강력하며, 다채롭고 복잡미묘하며, 정교하고 논리적이다.(특히 <멋진 신세계>와 <1984>에서 도드라진다.) 피곤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하며 읽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독을 넘어 설득을 당할 위험성마저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거짓의 세계, 쾌락의 세계에 스스로 안주하려는 사이퍼처럼 어리석게도 '멋진 신세계'를 동경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행복하고 즐거우면 됐지! 그게 뭐 어때서?)


    네 작품 모두의 내용과 제목에 담겨진 강력한 역설은 곧 작가의 강력한 경고임에 분명하다. 일말의 희망도 허용치 않는 어둡고 절망적인 결말은 우리에게 칠흑 같은 어둠을 보여줌으로서 한줄기 빛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재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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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결론을 맺고 끝내기엔 뭔가 섭섭하기도 하고 미지의 독자에게 불친절한 것 같기도 하여(그래서 도대체 책 내용이 뭐냐고??) 각 권마다 최대한 간략하게 마무리하고 끝내기로 하자. 원래 각론에서 총론으로 나가야 하는데 쓰다 보니 어떻게 순서가 뒤바뀌어 버렸다.

    네 권의 줄거리를 통째로 옮겨 정리하기엔 또 한편의 소설이나 논문이 될 수 있기에 과감히 포기, 생략하고 본문 중 내게 인상 깊게 다가온 단락, 문장만을 단편적으로 발췌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본문은 파란색으로 구별한다.)

 



    <우리들>


    고마운 압제 (...) 자유라고 불리는 미개한 상태 (7p) - 인간은 자유가 부담스럽다. 자유가 주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혼란스럽게 헤매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반면 통제와 지시는 편안하다.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자유와 행복은 반비례한다. 인간은 자유로울수록 불행하고 지시받을수록 행복하다. 그래서 기꺼이 자유에서 해방되어 열렬히 통제를 맞이한다.


    “은혜로운 분”의 이름으로 단일제국의 모든 번호들에게 선포한다. (...) 나, D503은 (8p) - <1984>에 “빅브라더”가 있다면 <우리들>에는 “은혜로운 분”이 있다. <1984>의 세계에 세 개의 전제국가가 있다면 <우리들>의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단일제국이 존재한다. D503은 주인공인 나의 이름 아닌 이름이다. 모든 이름은 번호로만 불린다. 이곳에선 개인은 철저히 소멸되고 집단만이 존재한다. 다양성은 혼란이고 악덕이며, 획일성은 질서이고 미덕이다. 그 누구도 “개인”이 아닌 “~중의 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동일한 것이다. (15p)


    시간 율법표에 의해 지정된 “개인 시간” (22p) - 하루 24시간 중 단 2시간만이 개인에게 주어진다. 나머지 22시간에 모든 번호들은 같은 활동을 한다. 그들은 같은 시간에 같이 잠들고 같은 시간에 같이 깬다.


    커튼 사용권 (...) 섹스 날을 위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29p) - 모든 건물의 자제는 유리다. 투명하고 찬란하고 명료한 이 곳 유리낙원에선 오직 그것을 하는 날에만 커튼을 치는 것이 허용된다.


    우리는 묶인 채 수술을 받았다. (293p) - 저항단체 메피와 함께 단일제국의 “은혜로운 분”께 저항하던 D503은 보안요원에게 체포된 후 영혼, 상상력이 제거되는 “위대한 수술”을 받고 단일제국의 “우리”로 복귀한다. 질병을 제거한 후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영화 <혹성탈출>에 보면 원숭이들의 사냥놀이에 쫓겨 달아나는 인간무리 중에 두개골에 크고 끔찍한 수술자국이 있는 인간이 잠깐 등장하는데 아마도 이것에서 힌트를 얻은 듯싶다.


    나는 우리가 승리하길 희망한다. 아니, 그보다 나는 우리가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이성은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이다. (294p) - “Because reason always wins" 소설의 마지막 단락, 마지막 문장이다. 숨 막히는 이성, 단일한 ”우리들“의 최종적 승리를 확신하는 더없이 암울한 결말이다. 감성, 개성, 생명이 말살되고 차갑고 투명한 이성, 합리주의, 과학문명(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포함한 모든 과학문명)만이 지배하는 어두운 미래상 그리고 그것만을 맹신하는 인류에게 던지는 강력한 경고장이다.



    <멋진 신세계>


    표준형 감마 계급, 불변의 델타 계급, 획일화된 입실론 계급, 그리고 수백만 명의 일란성 쌍둥이들에 의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대량 생산의 원칙이 마침내 생물학에도 응용된 것이다. (15p) - 신세계는 제품 생산하듯 인간을 공장에서 만들어낸다. 사회적 역할에 따라 각 계급에 맞는(알파, 베타, 감마, 델타, 입실론의 5등급으로 나뉜다) 맞춤형 인간을 제작하는 것이다. 첨단 생명공학 덕택에 하나의 난소에서 최대 1만 5천명의 성인을 얻을 수도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숙명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죠. (27p) / 맞는 말이에요. 지금은 모든 인간이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103p) - 그러기 위해 수정된 태아 때부터 차별화된 인위적 조작을 가한다. 계급이 낮을수록 산소와 영양을 조금만 공급하거나 열대지방의 노동자로 예정된 태아에게는 추위에 공포심을 갖도록 조건반사적 훈련과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한편으론 논리가 없는 단순한 메시지를 끝없이 반복하여 들려주는 수면학습법을 통해 쓸데없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무의식을 형성시킨다. 예를 들면 “좋아!” “싫어!” 따위다. 여기에 왜?에 대답할 수 있는 논리적 이유 따윈 없다. 아무런 고민이나 의심이 없는 조건반사적 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노예의 일을 사랑하는 노예의 생산 - 소설 속에서는 맡은 소임을 다함으로서 사회가 지속적으로 굴러가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육체노동자들의 생산이 가능해진다. 어떤 계급, 어떤 직종이던지 위아래의 다른 계급, 직종과 비교하여 불행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만족하며 행복하다. 이곳의 모든 인간에겐 날 때부터 행복이 보장되어 있다.(간혹 발견되는 열성 돌연변이를 제외하고) 비록 병 속에서 제조되어 이 세상에 나오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병 속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네. (294p)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 (58p) - 수면학습법의 주요 메시지. 프리섹스다. 일종의 유희이며 공동체의 기쁨이다. 신세계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지나치게 사랑하지 못하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서 일부일처는 성인, 성녀를 넘어 천연기념물이 된 지 오래다. 쾌락은 죄가 아니며 순결은 낡은 윤리다. 순애보도 없지만 배신이란 것도 없다. 가족은 해체됐고 엄마, 아빠가 누군지 모르며 누구도 묻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소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 (72p) - 신세계는 소비, 새 것, 가벼운 것이 미덕이요 절약, 낡은 것, 진지한 것이 악덕이다. 그곳에선 수선하는 것보다 차라리 버리는 것이 더 낫다. 그래서 800명의 간소화 생활 주창자들이 희생을 당했고 2천명에 달하는 문화 애호가들이 대영박물관에서 대학살을 당했다. 그런 곳에선 추사의 고졸한 멋과 정신이 깃든 <세한도>는 쓰레기고 고생을 사서 하는 마라토너들은 공공의 적이다. 따라서 대량소비와 즐거움을 미덕으로 하는 소비지향의 자본주의는 반문화일수밖에 없다는 거! But! 자본주의는 그런 비판적 문화마저도 상품화하여 팔아먹는 괴물이라는 거!!

 



불쏘시개로 쓰기에도 시원찮을 쓰레기, 국보 제180호 추사의 <세한도>



    기뻐하고 기뻐하라! 그리고 기뻐하다가 죽어라! (111p) - 그리고 죽을 때까지 기뻐하라! <죽도록 즐기기>와도 의미가 상통하는 이 말은 신세계의 인간들이 성(性)스럽고도 성(聖)스러운 단체혼음의식에서 부르는 합창의 일부분이다. 막장으로 유명한 임성한씨의 어느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TV를 보던 중 너무 웃다가 죽었다던데 이것을 패러디한 것인가?! 헉슬리의 메시지를 전하려던 수준 높으신 임 작가님을 몰라 뵙고 평소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아 급 쏘리! ^^


    지적으로, 그리고 작업을 하는 시각에는 어른이지만 감정이나 욕망에 이르러서는 갓난아기들이 되고 말지. (127p) - 성숙함, 어른스러움의 긍정적 의미는 많이 알거나 힘이 세거나 일이 능숙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얼마나 욕망을 절제하고 감정을 다룰 수 있는가가 성숙함의 척도다. 하지만 신세계에선 어른스러움과 절제는 도리어 악덕이다. 오늘의 즐거움을 내일로 미루고 진지하게 사색을 하거나 고독을 즐기는 등(맙소사! 고독을 어떻게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유치한 행동 양식에서 벗어나 어른스런 행동을 한다면 당장 경고를 받는다. 이런 인간은 모두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별종이다. 하긴 우리 주위에도 몸과 지식과 나이만 어른이지 감정과 욕망을 다루는 데는 갓난아기 못지않은 유치한 어른들이 많지 아니한가!


    결국 하층 계급의 일을 맡은 자들은 상층 계급의 일을 맡기 위해 끊임없이 권모술수를 부렸고, 상층 계급의 일을 맡은 자들은 그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음모를 꾸며댔지. (...) 가장 적절한 인구는 빙산과 같은 형태가 되도록 만드는 거야. 9분의 8은 수면 아래에 있고 9분의 1은 수면 위에 있도록 말이야. (295p) - 신세계는 고립된 섬에 가장 뛰어난 알파계급만을 이주시키는 실험을 하지만 결과는 위와 같은 혼란과 실패로 귀결된다. 그래서 누군가는 하층 계급이 하는 궂은일은 해야 하고 이왕이면 그들도 행복해야 하고 그러려면 그런 조건에 맞는 맞춤형 인간을 대량생산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신세계의 인구계급구조는 알파로 갈수록 소수, 입실론으로 갈수록 다수를 차지하는 극단적인 빙산, 피라미드 구조를 갖추게 된다. 이것은 “은혜로운 분”을 최정점으로 하는 <우리들>이나 극소수의 내부당원, 소수의 외부당원, 절대다수의 대중으로 구성된 <1984>와 똑같은 구조인 것이다.


    모든 변화란 안정에게는 위협적인 요소 (297p) - 보수에 관한 수천 권, 수만 페이지의 결론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바꾸지 말자!”, 한 단어로 줄이면 “이대로!”다. 과거의 좋은 전통을 이어받아 지키자는 보수는 사전적, 교과서적인 의미일 뿐. 현실에서 보수란 이미 안정을 취한 기존 체제를 지키거나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다. 공산체제에선 공산주의자가, 자본체제에선 자본주의자가 보수주의자다. <우리들>의 단일제국, <멋진 신세계>의 행복의 세계, <1984>의 오세아니아가 곧 보수체제인 것이다. 모든 체제는 안정화되면 보수화된다.


    저는 편안하고 안락한 것이 싫어요. 저는 신과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과 죄를 원합니다. (315p) - 주인공인 존의 대사. 그가 원한 것은 인간답게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소박하거나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여기서도 물론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존귀하고 엄숙한 “존엄”을 의미했고 신세계에서 그것은 단지 “불행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다.


    소마와 오랫동안 자신을 이끌었던 관능의 광란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진 존은 히스 초원에 누워 잠을 청했다. (339P) - 신세계의 생활양식과 온갖 문명의 이기(利器)로부터 도망쳐 외딴 섬에 은둔해 살던 존을 사람들은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오락과 유희에 굶주린 이 문명인들은 이 야만인을 동물원 원숭이 보듯 신기해하며 괴롭히고 이에 흥분한 존은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폭주하고 만다. 잠에서 깨어난 존은 이 모든 것을 떠올리고는 “오, 나의 하느님! 오, 하느님!” 두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가렸다. 그는 결국 자살한다. 이 행복한 지구로부터 영원히 도피함으로서 “불행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존엄”을 쟁취한 것이다.



    <1984>


    예전에 읽고 썼던 글(☞ 조지 오웰의 “1984”와 대한민국의 “2010”)로 대신한다.



    <죽도록 즐기기>


    인간들의 거의 무한정한 오락추구 욕구 (10p) -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다. 적당히 즐기고 때로는 진지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놀거리가 지천으로 널려있고 사람들은 앞 다투어 쾌락을 탐닉하는 이곳에서 재미는 이제 인기의 전제조건이자 생존도구다. 고통보다 권태를 못 참고 악플보다 스크롤 압박을 싫어한다. 웃기고 소모적인 재미가 바닥이 나거나 싫증이 나면 괴롭고도 파괴적인 재미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1984>에서 전쟁, 증오, 파괴, 광적인 대중 집회와 연설 등이 놀거리, 여가소비, 감정의 배출구로 작용하는 것은 어둡고 파괴적인 유희적 인간의 또 다른 얼굴이다.


    어떤 사건이 눈앞에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는 곧바로 사라져버리곤 하는 삐까부 세상(peek-a-boo world) (129p) - TV로 대표되는 현대전자문명이다. Anytime, Anywhere, 짧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상과 정보의 홍수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그것은 3.5초(방송 화면이 한 장면에 머무는 평균시간) 간격으로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이래로 정신없이 악재가 악재를 덮으며 정권이 유지될 때 나는 시민들의 진을 빼놓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악재든 호재든 곧 흘러가고 잊혀 진다. 실재로 한나라당은 정권연장에 성공했다. 잊으라고 해서 잊은 것도 아니고 우리의 기억력이 모자라서 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정권의 잘못도, 시민의 잘못도, TV 언론 등 미디어 종사자들의 잘못도 아니다. 바로 TV 때문이다. 애꿎은 기계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TV 등 메스미디어의 힘이 그 자체로 막강하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는 가히 쓰나미급이다. 자동차에서 양말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뒤섞여 우리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밀어닥친다.

 



닭치고의 교훈 “지난일은 잊자!” (네.네.네.네.네.네~)



    이 구절(“자, 다음 뉴스는...”)은 초고속 전자매체로 그려진 세상은 질서도 없고 의미도 없기에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단초이기도 하다. (159p) - 빠름, 많음과 함께 하찮음, 재미가 정보홍수의 또 다른 특징이다. 질서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이 카오스의 세계에서 질서와 의미를 찾으려는 진지한 시도는 번번이 외면당한다. 연예오락을 주제로 화기애애하게 수다를 즐기고 있는 모임에서 정치사회적 허튼소리(!)를 꺼냈다간 순식간에 분위기 썰렁해지며 눈치 없는 주책이나 잘난체하는 성가신 존재로 왕따 당한다. 이 세계엔 진지하고 심각한 것이라곤 없다. 오직 재미만이 있을 뿐이다.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는 구세대 궤변이 변형되어 '옳은 것보다 재미난 것이 좋다'는 신세대 버전이 되었다.

 



바보상자가 내게 묻는다. “Why so serious?"

이것은 질문이라기보단 최종적 승리선언이다.



    문화적 풍조가 황폐화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문화가 감옥이 되는 오웰식이다. 두 번째는 문화가 스트립쇼와 같이 저속해지는 헉슬리식이다. (237p) - 저자에 의하면 미래의 악한 권력은 오웰식처럼 굳이 거칠고 무식하고 번거롭게 대중을 물리력으로 억압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소마와 같은 일종의 마약, 마취제로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간단하고도 세련된, 더 효과적이고도 강력한 방법이 있다. 채찍보단 당근이요, 당근보단 서커스다. 이것은 텔레비전의 통치다. <멋진 신세계>의 소마가 곧 텔레비전인 것이다. 누가 즐거움의 파도에 저항하기 위해 무기를 들려 하겠는가? (239p)

 

 



    세 소설가와 한 비평가가 모두 비관적인 세계관을 가진 것일까? 포스트먼 역시 전망이 그리 밝지도 않고 뾰족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도 않다.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빅브라더에 저항할 용기도, 소마의 유혹을 이겨낼 의지도 충분치 않은 내게 네 명의 대가들도 제시하지 못했던 해법이 있을 리 만무하다. 다만 오웰보다 헉슬리에 동의하는 입장에서 의지를 강조하고 싶다.

    의지박약에서 정의를 향한 용기를 기대할 순 없다. 그것은 걷지도 못하는 유아에게 뛰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의지가 있고서야 용기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엄청난 용기보다 소소한 의지다. 일상의 작은 유혹부터 이겨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타락한다면 개인은 비루하거나 탐욕스럽게 되고 사회는 저속하거나 살벌하게 될 것이다. 종국에는 <2015 대한민국>이 참을 수 없는 무거움과 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공존하는 오웰과 헉슬리의 <1984 신세계>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무협지에서 악당이 빛과 소리와 향기를 동원한 온갖 마술을 부려 우리의 주인공을 현혹시킬 때 주인공은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오직 자신의 내면만을 바라보고 귀 기울인다. 그 많은 것 중에 진짜를 찾아내고 일합을 겨뤄 승리한다. 우리도 이렇듯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때, 뭔가가 잘못돼 있고 결핍되어 있다고 느낄 때, 오히려 눈과 귀를 닫고 오직 우리 안의 이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둡고 조용한 그 곳에 우리가 찾던 빛과 소리가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끝)

 



    ※ 아래는 만화로 요약한 <죽도록 즐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