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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108 : 베드로전서, 후서

어멍 2011. 10. 21. 22:46


    성경읽기 0108 : 베드로전서, 후서



    저자 : 베드로가 실루아노(실라)의 도움을 받아 기록한 편지

    주요 인물 : 베드로, 실라, 거짓 선생들

    기록 목적과 대상 : 베드로전서(Ⅰ Peter)는 ‘소망의 서신’이라고도 불리며 극심한 박해 아래 있던 성도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격려로 가득 차 있다. 베드로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시련과 고통이 오히려 그들에게 영광스러움을 안겨다 주는 축복의 기회임을 상기시키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박해를 이기라고 신자들을 격려, 위로하고 있다.

    베드로후서(Ⅱ Peter)는 영지주의와 도덕폐기론을 내세우며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유혹하는 거짓 선생들에 대해 경고하고,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니고 계속 성장할 것과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인내할 것을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

해를 입었다고 도로 보복하지 말며, 욕을 먹었다고 그 사람을 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삶을 축복해 주십시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이 축복받은 인생을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4장 15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이거나 도적질하거나 다른 사람을 괴롭힌 죄로 고난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16절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난을 받았다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십시오.


5장 7절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악에는 악, 선에는 선이 아니다. 당한 만큼 보복하지 않고, 욕먹은 만큼 욕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유약하다고 깔보고, 덜 떨어진 바보취급하며 함부로 대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억울하더라도 참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분 자신이 축복받은 인생을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문해보자. 그리스도인,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이 현재, 우리사회에서 과연 자랑스러운 이름인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도리어 부끄러운 경우가 많다. 어디 가서 떳떳하게 ‘나 기독교인이오!’라고 크게 자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의식적으로 사회에 귀를 닫고 교회 안에만 숨어 있더라도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기독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이 가르침을 철저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불성실하게 행하고 있거나 도리어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고 몸은 악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거나 도적질하거나 다른 사람을 괴롭힌 죄로 벌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기에 받는 박해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탐욕에 빠져 봉헌물을 훔친 좀도둑 아간이면서도 사울에 쫓겨 광야를 떠도는 위대한 왕 다윗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목회자든 일반 성도든 죄를 쌓지 않으려면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는가? 오직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군대에 갈 수 없거나 혹은 군대로 끌려가거나, 세금을 더 내거나 세금을 내지 않고 대신 그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박탈되거나 하는 시민권의 제약이 있는가? 없다!

    여기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공화국이다. 더구나 기독교가 종교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타 종교에 비해서 크다. 그 파워가 상대적으로 강하다. 기독교는 지금, 여기서 핍박받는 약자가 아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끄러운 경우는 심심찮게 있지만 (오직)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난을 받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주후 1세기의 로마제국에서는 달랐다.

    제국 내 여러 민족, 여러 지방의 현장에서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숱한 핍박을 받았고 최종적으로 로마제국에서 공인되기까지 로마의 종교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몇몇 황제에 의해서 수많은 순교자의 피를 뿌려야만 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주님을 믿었던 것이다.

    그들에겐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다. 구원의 확신이 필요했다. 걱정과 근심이 있는 자, 박해받는 자, 힘들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격려다. 구원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다. 하지만 교만과 욕심이 있는 자, 박해하는 자,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자, 그러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입에 담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넘어짐과 회개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주님의 심판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부끄러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떳떳하고 자랑스런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하기 나름이다.



베드로후서 2장 20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죄악에서 해방된 사람이, 다시 그 악한 생활로 되돌아가 세상 죄에 끌려 다닌다면, 그 상태는 이전보다도 훨씬 나쁠 것입니다.

21절

차라리 바른 길을 모르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바른 길을 알면서도 자신들이 받은 거룩한 가르침을 내팽개쳐 버린다면, 오히려 그 길을 알지 못하는 편이 낫습니다.

22절

“개는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는 씻은 후에 다시 진흙탕에서 뒹군다.”라는 속담이 그들에게 들어맞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악한 사람보다 선에서 악으로 타락한 사람이 더 악하다. 처음부터 선한 사람보다 악에서 선으로 회개하여 돌아온 사람이 더 선하다. 그는 진리를 알지만 진리를 배반하였다. 그는 죄의 유혹에 빠졌었지만 그것을 이겨내었다. 선을 배반한 타락천사가 가장 악하고, 악의 유혹을 이겨낸 회개한 죄인이 가장 선하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가룟 유다는 은전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겼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던 사도 바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 가장 충실한 주님의 종이 된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계급적으로 가장 높은 슈퍼엘리트에서 자신의 계급을 극복, 초월한 위대한 민중의 지도자가 나오기도 하고 가장 낮은 민중계급에서 자신의 계급을 배반한 난폭한 독재자가 나오기도 한다. 이것이 세상 이치의 아이러니요, 하나님의 섭리다.


    처음부터 선한 사람, 끝까지 의로운 사람은 없다. 인간이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완전’히 선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다. 완전히 선하고 완전히 의로운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더욱이 유혹이 널려있는 지상에 보내진 인간은 죄악에서 자유롭지 않은 불완전한 존재다. 그래서 인간의 선함 중 최고로 치는 것은 ‘악을 아는 선함’, ‘악의 유혹을 이겨낸 선함’이다.

    악함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악함 중 최고로 치는 것은 ‘선을 아는 악함’, ‘선을 배반한 악함’이다. ‘주를 믿는다면서 행하는 악함’, ‘한 때는 주님을 믿었다가 이제는 타락하여 죄악에 끌려 다니거나 도리어 앞장서 죄악을 퍼트리고 있는 악함’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죄악에서 해방된 사람이, 다시 그 악한 생활로 되돌아가 세상 죄에 끌려 다닌다면, 그 상태는 이전보다도 훨씬 나쁠 것입니다.”




타락천사 다스베이더
그도 한 때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젊은이, 정의의 수호자인 제다이 기사였다.



    베드로는 이렇듯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유혹하는 거짓 선생들에 대해 준엄하게 경고하고,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성도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22절 말씀은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듯, 어리석은 자는 자기 미련을 되풀이한다.’[잠언 26:11]에서 따온 것으로 몇 번의 경고와 권고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그러한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죄 짓고 회개하고, 회개하고 다시 죄 짓고... 속고 속고 그리고 또 속고... 아담이 그러했고, 광야를 방황하던 유대민족이 그러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그들이 그러했고, 지금의 우리 역시 그러하다. 이것은 인간이 악한 존재이기 때문보다는 어리석은 존재, 미련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스베이더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처음부터 악하지 않았다. 그가 악해진 것은 약했기 때문이다. 그의 약하고 불완전한 마음이 악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다스베이더의 타락의 책임은 미성숙에 있다.


    성선설(性善說)도 일리 있고 성악설(性惡說)도 일리 있지만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성유설(性幼設)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어린 존재, 흐릿한 존재, 미성숙한 존재로 태어난다. 인간의 육체뿐만이 아니라 의식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밝고 성숙하고 완전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의 선함과 사랑과 의로움에 다가가기 위해선 선한 천성(天性) 못지않게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지식과 지혜에 못지않게 성숙해지기 위한 부단한 공부와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의 공부는 영어단어 외우고 수학공식 암기하는 그런 공부가 아니다. 여기서의 성숙은 수염이 나고 슴가가 나오는 호르몬 작용, 혹은 세월 따라 저절로 짬밥이 늘어나는 장유유서의 권위적 질서가 아니다. 욥의 친구들 중 가장 지혜롭고 신앙적으로 성숙했던 이는 가장 나이 어린 엘리후였다.

    성숙한 것은 분별력이 있고 유혹에 강하여 대개가 선하기 쉽다. 미성숙한 것은 분별력이 없고 유혹에 약하여 대개가 악하기 쉽다. 성숙하다는 표현과 선하다는 표현은 거의 같은 표현이다. 지극한 선에 이르는 열쇠는 성숙함이다. ‘성숙한 선’이야말로 ‘완전한 선’에 가장 근사한 표현 중 하나다.


    베드로전서, 후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