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잡설, 상념, 기타등등

시크릿 가든 엔딩. 10점 만점에 15점.

어멍 2011. 1. 24. 23:04



SBS <시크릿 가든>



    오랜만에 잘 만든 명품 드라마를 봤다.

    원래 드라마를 챙겨보지 않는데 우연히 아내가 보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다가 그만 꽂히고 말았다. 한 15,16회부터 본방을 사수했나?? 하여튼 이내 10여회를 ‘폭풍 다시보기’(요새 폭풍이 유행이다. 폭풍 감동, 폭풍 웃음...)... 감동적인 장면에선 아내와 손잡고 같이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눈... (ㅠ.ㅠ) x (ㅠ.ㅠ)

    김은숙 작가가 <파리의 연인>, <온에어>를 썼다던데 전작은 잘 모르겠고 스토리텔링이 아기자기하면서도 치밀한 게, 막장 드라마는 물론이고 일반 통속 드라마의 범주는 벗어난 경지다. 영혼이 바뀐다는 비현실적인 상황도 몰입을 가능케 하는 이야기 솜씨에 그리 억지스럽지 않게 느껴질 정도... 거기다 많은 유행어를 만들어낸 명대사까지...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삼신할매 랜덤 덕에 금 숟가락 물고 태어난”, “문자왔숑. 문자왔숑.”, “이건 댁들이 생각하는 그런 옷이 아니야. 이태리 장인이 한~땀 한~땀.”... 등등. 모두 재밌고 인상 깊은 대사들이다.

    하지만 내게 가장 감명 깊은 대사를 두 개만 뽑으라면... 하나는 최상위 부자들은 비용을 떠나 차별받는 것을 원한다는 거. “그들이 원하는 건 특권과 차별이야”란 대사였나?!... 그들을 잘 알고, 그들의 심리를 이용해 장사를 하는, 그들중의 일원이기도 한 주원의 대사다. 계급갈등, 계급의식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문화와 정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사다. 내가 쓴 포스팅 <조지 오웰의 "1984"와 대한민국의 "2010">에 썼던 문구가 드라마에서, 그것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다니...

    하여튼 요새 이슈가 되고 있는 무상급식도 그렇고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물론 아이들 급식비용 아껴서 강도 파고 다리도 놓아 토건족, 재벌회장님 뱃속 채울려는 현실적인 욕심도 있겠지만 그들은 원래 정서적으로 '평등', '보편'이란 단어를 싫어하게 되어 있다.

    또 하나는 라임이가 주원과의 신분차이 때문에 힘들어서 울며 하던 대사 “(내가) 거지같아! 거지같아!”다. 1%의 꾸밈도 없는 처절한 독백이다. 드라마 주제곡 가사이기도 한 이것이야말로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대사일 것이다. “이 바보같은 사랑! 이 거지같은 사랑!”이다. (천하의) 김주원이 자신을 희생하여 라임에게 생을 주려는 바보같은 사랑을 한다. (천하의) 길라임 역시 자존심을 버리고라도, 온갖 수모와 멸시를 감수하고라도 주원과의 사랑을 지켜내려는 거지같은 사랑을 한다.

    사랑은 재벌 3세 도련님과 선머슴같은 스턴트우먼과의 관계도 가능케 한다. 심지어 최철원같은 개망나니 황태자와 증오에 차고 치기에 들뜬 삐뚫어진 운동권 여학생과의 관계도 가능케 하지 않을까?!?(이건 좀 오반가?) 사랑이야말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 재밌게 하는 것, 힘들고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하는 마법이다.

    All I need is your Love!




이것이 바보같은 사랑! 이것이 폭풍 감동!



    로맨틱 판타지 드라마를 정치사회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코미디를 다큐의 눈으로 보는 것만큼 부자연스런 일이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이런 시각들이 가볍게 터치하듯, 양념을 치듯 언듯언듯 비친다. 바로 사회지도층의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 또는 사회지도층과 소외계층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에피소드들이다. 작가는 이런 다소 무겁고 지루한 주제마저도 재밌고 따뜻하게 녹아들게 하고 있다. 무성의하거나 생색내기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상기한 대사도 그렇고 주원이 라임의 옥탑방을 보고 충격을 받고 고민할 때 펼쳐든 책도 (세계의) 빈곤에 대한 책이었다. 주원은 그 세계 사람이지만 그 세계에 갇혀 있으려 하진 않는다. 라임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를 이해시키고 있다. 라임 역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탈출과 신분상승을 꿈꾸고 있지 않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눈이 크고 명랑한 캔디형도 아니고 현실에 굳게 발을 딛고 선 씩씩한 스턴트우먼이다. 결코 주원의 배경 앞에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일을 소중히 여긴다. 아무리 럭셔리하고 도도한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이라도 그녀 앞에선 똘추(똘아이 추리닝)일 뿐이다.


    콧대 높고 싸가지 없고 심술궂고 계산에 철저하지만 소외된 이웃을 멸시하진 않는다. 타인의 아픔에 둔감하지 않다. 드러내놓고 명품을 자랑할 만큼 순진무구, 유치하기까지 하다. 주원의 본 모습은 마지막으로 어머니 문분홍 여사에게 꽃다발과 편지를 보내며 사랑한다고 말하던 사랑스런 아들,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 아닐까.

    항상 씩씩하고 용감하지만 한류스타에 열광하고 가진 것만으로 어떻게든 멋을 내보려는 소녀같은 라임. 주원을 패고 차지만 항상 설레고 두근두근하는 라임. 아무리 씩씩해도 문분홍 여사 앞에서는 결국 여느 여자처럼 무너지고 마는 라임. 주원과 라임의 공통코드는 바로 순수다. 때 묻지 않은 마음이다.

    주원과 라임은 다르면서도 같다. 같으면서도 다르다. 서로가 각자의 개성을 지키면서 상대의 개성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 바로 사랑의 비밀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도 자기와 완전히 똑같은 자와는 사랑에 빠질 수 없다. 자신의 복제인간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영혼이 뒤바뀌는 것이 두세 차례 흔히 벌어진 것이 다소 리얼리티를 훼손하였지만 어차피 판타지 드라마, 별로 탓할 것은 아니다. 문분홍 여사가 끝까지 타협치 않고 라임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좋았다. 행복하고 성대한 결혼식 장면, 원수까지 모두 모여 화해, 용서하고 하하호호 웃으며 기념사진 찍는 것으로 끝나는 홈드라마보다는 훨씬 나은 결말이었다.

    다만 주원과 라임이 계속 주원이 살던 집에서 사는 것은 좀 아쉬운 느낌! 문 여사와 주원의 재산을 둘러싼 관계정리, 그 정확한 계산의 결과치고는 뭔가 어정쩡한 느낌이다. 이제 오너가 아닌 월급쟁이다. 백화점 사장 월급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운동장보다 넓은 정원이 딸린 그 큰 집에 사는 주거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고급 빌라나 강남 40,50평대로 나와 사는 것으로 그려졌다면 더 리얼리티가 살며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것만 해도 과분하게 만족스런 해피엔딩이다. 이것이 라임과 주원의 균형점에 가깝다. 다시 장소 섭외하는 것도 일이고 이제까지 익숙한 아름다운 풍경을 포기하는 것은 좀 아깝지만 인어공주에서 갑자기 신데렐라로 넘어간 느낌이 나는 게... 어설픈 해피엔딩의 혐의가 나는 옥의 티랄까.

 

    하여튼 <시크릿 가든>의 결말, 종반부는 10점 만점에 9점이다. 그럼 10점 만점에 15점은? 바로 마지막 엔딩장면을 말함이다.

    병원 장례식장인 듯한 넓은 마루에 라임이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워있다. 모두가 떠나간 후 홀로 남겨진 라임은 울며 지쳐 잠들어 있다. 주원은 절뚝거리며 다가와선 그녀에게 "미안해. 미안하다"라고 말한 후 그녀 옆에 누워 그녀를 바라본다. 라임은 슬픈 꿈을 꾸는지 작게 흐느끼며 미간을 찌푸린다. 주원은 라임의 찡그린 미간의 주름살을 펴준 후 그녀의 손을 마주잡고 잠에 빠진다. 이렇게 한쌍의 데칼코마니처럼 주원도 라임 옆에서 새우잠에 빠지는 것이 마지막 엔딩 장면이다.




드라마의 중반부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
주원이 잠든 라임의 이맛살을 펴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라임에게 너무도 미안해서, 이 세상에 대신 남겨진 자신이 너무도 힘들어서 주원은 자신의 사건을 잊게 된 것이리라. 일종의 자기방어기제다. 주원이 라임을 처음 만난 후에 왜 주원의 머릿속에 라임이 계속 떠나지 않고 남아있었을까. 라임과 주원이 혼수상태에서 함께 깨어나 주원이 라임과의 사랑의 기억을 잊었을 때도 주원은 라임의 발동작에 무의식적으로 발을 뒤로 빼며 움츠린다. 어쩌면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까. 머리는 잊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 때 그 소녀가 지금 이 여자라는 것을...




바로 이 장면!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하나의 씨앗이 백송이 화려한 꽃봉오리들을 피우듯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다. 모든 것의 열쇠다. 마지막 장면이 곧 처음 장면이다. <메멘토>, <저수지의 개들>, <인셉션> 등에서 보여지는 정교한 연출법이다. 곧 시간을 뒤섞거나, 역순으로 하거나, 압축하는 등의 고난도 연출의 일종이다. 문장으로 치자면 수미쌍관(首尾雙關) 정도 될라나.

    단순히 기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텅 빈 마루에 오직 둘만이 마주보며 누워있다. 너무 외롭고 쓸쓸하기도 하고, 너무 정답고 애틋하기도 하다. 라임은 주원의 반쪽이고, 주원은 라임의 반쪽이다. 처음부터 그들은 합쳐질 운명이었다. 하나의 세계! 오직 둘만이 만들어내는,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다. 멈춰있거나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세계다. 내겐 그 어느 장면보다도 감동적이고 좋았다. 깊은 여운이 남는 엔딩장면이다.

    주원 ♡ 라임. Forever!


∽∽∽∽∽∽∽∽∽∽∽∽∽∽∽∽∽∽∽∽∽∽∽∽∽∽∽∽∽∽∽∽∽∽∽∽∽∽∽∽∽∽∽∽∽∽∽∽∽∽∽∽


보너스 영상 - 기억을 찾는 주원

종합하여, 시간을 압축해서 역순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연출법
운명적인 사랑이다. 하지만 시간의 검증, 담금질을 통과한 사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