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20 : 사무엘하 4장~6장

어멍 2010. 8. 3. 21:15


    [사무엘하]의 주요 인물은 다윗, 이스보셋, 요압, 암논, 압살롬.

    핵심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다윗’

    주요 내용은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좌절하고 범죄했던 일들을 중심으로 한 다윗 왕정시대의 이야기들.



4장 10절

언젠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해서 ‘왕이시여! 사울이 죽었습니다’라는 말을 전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그를 시글락에서 죽여 버렸다. 그런 소식을 가지고 오는 자는 그런 보답을 받아야 마땅하다.

11절

하물며 죄 없는 사람을 그의 침대 위에서 죽인 너희는 말할 것도 없다.

 

    유다의 왕이 된 다윗이 이스라엘 왕 이스보셋을 암살하고 그 소식을 전하며 아첨하는 이스라엘 장교 출신 두 명에게 그 죄를 물으며 하는 말. 이스보셋은 사울의 아들로 그의 사후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인물이다.

    ‘언젠가 어떤 사람’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죽은 사울왕의 왕관과 팔찌를 갖고 다윗을 찾아와 사울의 죽음을 알린 어떤 젊은이 이야기다. 그가 죽어가는 사울이 자신에게 고통을 호소하며 죽여달라고 하기에 직접 죽였다고 전하자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사람을 죽인 죄로 그를 죽인다. 사무엘상 마지막장에는 사울의 자결 이외 별다른 얘기가 없으니 사울이 스스로 죽음에 이르렀는지, 젊은이가 마지막으로 그 숨을 거두었는지, 주검에서 왕관과 팔찌만을 취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사울이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군사령관인 아브넬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나 이스보셋은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아브넬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아브넬이 사울의 후궁이었던 리스바와의 동침문제로 이스보셋에게 추궁을 받자 그들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지고 아브넬은 다윗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다윗은 이런 아브넬을 위해 잔치까지 벌여주지만 아브넬은 다윗의 진중에서 일찍이 그에게 자신의 동생이 죽임을 당한 구원(舊怨)이 있던 다윗의 군사령관인 요압의 암수에 걸려 죽임을 당한다.

    다윗은 모르는 일이다. 다윗은 “내가 비록 기름 부음 받은 왕이지만 오늘은 내가 약하여서 이 스루야의 아들들(요압 무리)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여호와께서 직접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바랄 뿐이다.”[삼하 3:39]라고 요압을 책망한다. 아직 다윗의 왕권이 강력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사울의 죽음, 아브넬의 죽음, 이스보셋의 죽음, 세 사건에서 일관되는 다윗의 태도로 봤을 때 그것이 교활한 위선같지는 않다.

    아브넬 없는 이스보셋. 대장군 없는 어린 황제다. 허수아비다. 이스보셋의 암살은 이런 불안과 두려움에 떨던 이스라엘 정국 하에 목숨을 보존하고 공을 세워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에 의해 벌어진 범죄였으리라. 결국 사울과 이스보셋의 이스라엘은 내분에 의해 망한 것이다. 아브넬과 그의 군대는 무력은 강하였으나 충성심은 없었으며 이스보셋은 혈통만 이었을 뿐 능력과 권위는 없었다.


    하나님에 대한 불경과 배신(신뢰를 저버리는 비겁하고 야비한 방법), 배반에 대한 단죄다. 자기 무리를 배반하고 하루아침에 어제의 적에게 감언이설로 아첨하는 자를 단죄한 이야기는 동서고금의 역사에 많이 등장한다. 너무 야비하고 저열하여 인간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배신은 나쁘다.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모든 배신이 악인가. 모든 배신은 수용해서는 안 되는 단죄 받을 죄악인가.

    내부고발, 개과천선, 참회와 회개를 배신이라고 하진 않는다. 굳이 배신이라면 악에 대한 배신이다. 무엇인가?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이다! 악에서 선으로, 소아(小我)에서 대아(大我)로, 인간에서 하나님으로 향하는 것은 배신이 아니라 정의다. 축복이고 은총이고 때로는 성스런 희생이다.

    김용철은 무엇인가. 삼성, 이건희에 대한 배신인가? 그는 살기위해 배신했는가? 맞다! 그의 저서 <삼성을 생각한다>에 의하면 삼성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가치관, 회의와 번민에 싸인 자아, 피폐된 삶 때문에 힘들어서, 살기 위해서 배신했다고 한다. 행복했었다면, 만족했었다면 그랬을 리 없다. 그는 단지 이건희, 이학수, 김인주 등 삼성수뇌부를 배신했을지언정 우리를 배반하지는 않았다. 그의 배신으로 인해 그는 물질적, 세속적으로 득을 보지 않았다. 오히려 고난을 자초하였고 충분히 이를 인지하고 각오하였다. 흔치 않은 강단, 흔치 않은 인물이다. 그는 삼성에서 세속적 영화를 누리며 죄를 지었던 죄인이다. 그는 삼성에 몸담고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한다. 그의 영혼은 구원받은 것이다. 공익, 고백, 속죄의 자격을 갖춘 그의 고발은 정의고 쾌거다.

    장세동은 무엇인가. 전두환씨에 대한 충성인가? 그는 목숨을 걸고 신의를 지킨 멋진 싸나이인가? 맞다! 단, 전두환씨 개인에게만 그런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우리를 배반했다. 처음부터 배신했고 지금도 계속 우리를 배신하고 있다. 쿠데타에 가담한 것에 대해 반성치 않고 있다. 조폭, 깡패, 쿠데타 무리에게 군인정신, 신의, 충성은 어울리지 않는다. 의리(義理)라는 말도 가당찮다. 패거리의식, 공범의식일 뿐이다.

    하지만 이보다 못한 경우가 있다.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경우다. 작은 이익에도 수시로 마음을 바꾸는 소인배, 기회주의를 철학으로 하는 하류인생들이다. 먹을 것을 쫓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철새들이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선을 좀 먹는 좀벌레와도 같다. 장세동은 적어도 그가 따르던 두목을 배신하진 않았다. 정직한 악인이다. 악하고 강한 적보다 가볍고 교활한 기회주의자들부터 척결해야 한다. 적에게도 격이 있고 배신에도 종류가 있다.


    도덕적으로 배신이냐 아니냐, 당당하냐 비겁하냐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배신은 나쁘다. 하지만 모든 배신을 배척하고 단죄해야 할까. 무엇을 기준으로 나누고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실지로 도덕적 기준을 떠나서 세를 불리려면은 다양한 세력을 받아들이고 품어야 한다. 다윗 역시 이스보셋을 배신한 아브넬을 받아들이기도 했고 아브넬을 비겁하게 죽인 요압을 직접 벌하지도 않았다. 전략적으로 벌하지 않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벌하지 못하기도 한다.

    적극적으로 이득을 취하기 위해 배신하고 전향해 오는 이는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언제고 다시 배신할 수 있다. 엄히 단죄하여 경계로 삼아야 한다. 단지 살기 위해 전향해 오는 이, 신념과 철학을 달리해서 넘어오는 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단, 받아들이되 중용해서는 안 된다. 중용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의 시험과 검증을 거친 후라야 한다.

    아직 30대인 다윗은 그러한 지혜롭고 명철한 왕이었다. 하나님에 대해 겸손하고 신실한 왕이었다. 어리석은 왕은 아첨에 경계하기 전에 좋아한다. 대의명분을 살피기 전에 작은 이익에 기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남의 불행에 슬퍼하기 전에 고소해한다. 옳고 그름을 살피기 전에 니편내편 따지기부터 한다.



6장 21절

나는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오.

22절

앞으로 더 낮아져서 체면을 잃는 일이 많을지라도, 여호와 앞에서는 그렇게 되고 싶소.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후 바알레(곧 ‘기럇여아림’이다)에 있던 하나님의 궤 역시 예루살렘으로 옮겨온다. 이 때 언약궤를 맞아 다윗이 몸을 드러내고 기뻐 뛰며 춤추자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인 미갈이 다윗을 비웃으며 책망한다. 이에 다윗이 미갈에게 하는 말. 미갈은 이 일 때문에 벌을 받아 죽기 전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된다.




성궤 앞에서 춤추는 다윗(David dancing before the Ark) - Terracotta, Victoria and Albert Museum



    우리에게도 90노모 앞에서 70아들이 색동옷을 입고 깨방정 춤을 추는 훈훈한 이야기, 오두방정 미친듯이 어리광을 부리는 아름다운 효행담이 전해져오고 있다. 나이완 상관없다. 노모가 보기에 70대 아들은 언제나 아들일 뿐이고, 아들이 보기에 90대 어머니는 항상 어머니일 뿐이다. 어머니가 정신이 맑지 않고 혹 자신을 못 알아본대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70이든 90이든 노인들일 뿐이고, 유구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엔 모두가 어리고 어리석은 인간들일 뿐이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호걸이라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 땅의 세속적인 인간은 니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권위를 따지고 체면을 차린다. 슬픔에 이르는 부러움과 미움에 이르는 시샘, 무거운 짐과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한다. 곳간보다 마음이 부자라면 굳이 권위를 내세우거나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다. 인간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자. 하나님 앞에 겸손한 이는 사람 앞에서도 겸손하다. 사람 앞에 겸손한 이는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하다.

    무릇 하나님의 백성은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다. 사납지 않고 온화하다. 심술궂지 않고 인자하다. 때 묻지 않고 천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