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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19 : 사무엘상 22장~31장

어멍 2010. 7. 28. 23:22


22장 17절

하지만 왕의 신하들은 여호와의 제사장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18절

그러자 왕은 도엑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제사장들을 죽여라.” 에돔 사람 도엑은 사울의 말대로 제사장들을 죽였습니다. 그 날, 도엑은 세마포 에봇을 입은 사람 팔십오 명을 죽였습니다.

19절

도엑은 또 제사장들의 성인 놉의 백성들도 죽였습니다.

 

    사울 왕을 피해 도망쳐 온 다윗을 도와준 죄로 왕이 아히멜렉 등 제사장들과 그 성의 백성들을 죽이는 장면.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가 되고 호위대장이 되었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왕의 본심을 알고 일찍이 각별한 우정을 나눈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의 도움으로 사울에게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무기도 없이 허겁지겁 놉으로 도망쳐 그 곳 제사장인 아히멜렉으로부터 숙식을 제공받고 골리앗의 칼까지 얻는다. 에돔 사람 도엑은 마침 그 곳에서 이를 지켜본 사람으로 사울 왕의 심복이다.

    그 후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신하나 자신을 경계할까 두려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친 척을 하여 결국 그 곳에서 쫓겨난다. 가드를 떠나 아둘람의 동굴로 도망쳐 그 곳에서 사백 명 가량의 추종자를 거느리게 되고 다시 그 곳을 떠나 모압 땅에 있는 미스베로 간다. 그 곳에서 모압 왕에게 당분간 머무를 것을 요청한다.

    다윗을 쫓던 사울 왕은 도엑으로부터 다윗 소식을 듣게 되고 결국 놉에 있던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희생을 당하는 것이다. 제사장, 성직자들을 죽이고 자기 백성들까지 죄 없이 죽였으니 학살이다. 당연히 민심이 그를 떠날 수밖에 없다. 사울은 이미 하나님의 영이 떠난 폭군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의 기도에 응답을 안 하신다. 사울에게 더 이상의 영광과 승전(勝戰)은 없다.


    지금이라면 당장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정권을 뒤엎을 중대 사안이다. 왕정이 아닌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선거라는 평가와 심판이라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이런 사태까지 가지 않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우리도 얼마 전까지 그리 다르지 않았다. 419도 6월 항쟁도 모두 피를 보고서야 정권을 뒤엎거나 굴복시킬 수 있었다. 518 광주는 더 많은 피를 뿌리고도 오히려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을 저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피를 통해 집권했으니 피의 거름위에 세워진 정권이었다.

    무엇인가. 시민의 힘이 권력의 힘보다 비교도 안 되게 미약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후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시민의 힘이 약하면 수백만이 목숨을 내 놓아도 잘못된 정권에 상처하나 낼 수 없고, 시민의 힘이 강하면 거짓말 한 마디에도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다. 지금은 어떤가. 말하자면 입만 아프다. 거짓이 만연하여 시민도 정권도 무감각해졌다. 이제 무엇이 참말이고 무엇이 거짓말인지조차 모를 지경이다. 피를 보지 않으려면, 생고생하지 않으려면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 감수성, 도덕적 감수성이 예민해져야 한다.


    도엑은 누구인가. 사울 왕의 주구(走狗)다.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닌 대단히 권력지향적인 세속적 인물이다. 하늘의 권세를 섬기는 자가 아닌 땅의 권세를 섬기는 자이다. 권력, 힘에 대한 예민한 후각, 감수성을 지닌 인물이다.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는 사울의 명령에 신하들이 주저하며 손을 대려 하지 않자 도엑은 주저 없이 나서 명령을 수행한다. 사울 왕이 폭군(暴君)이라면 도엑은 폭리(暴吏)이다. 마름, 앞잡이, 완장이다. 권력의 수족이고 중요 지지기반이다.

    ‘에돔 사람 도엑’이다. 에돔은 지명이다. 성경에 보면 이름 앞에 꼭 지명이나 그 아버지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부산 사람 홍길동’, ‘홍문의 아들 홍길동’, 아니면 ‘서울 사람 홍문의 아들 홍길동’ 식이다. 이력, 신상정보 등 인물에 대한 정보의 양이 적고 유통속도가 늦은 사회였던 영향이 클 것이다. 결국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정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고향과 가문이다. 고향과 가문을 앞세워 지역주의, 가족이기주의로 흐를 수도 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명예는 고향과 가문이다. 긍정적으로 되새길 일이다. 도엑이 에돔을 욕되게 한 것같이 고향과 가문을 욕되게 하지 말라.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우리의 민주주의 수준은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의 감수성은 도덕에 민감한가, 욕망에 민감한가. 우리는 우리의 고향과 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도망치는 다윗을 도운 아히멜렉인가, 사울 왕을 따르는 도엑인가. 교만에 빠진 사울인가,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는 다윗인가. 하나님의 영은 과연 우리와 함께 계신가.

    자신있는 대답보다 겸허한 질문이 먼저다.



24장 10절

어떤 사람은 왕을 죽이라고 말하였으나, 나는 ‘내 주는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왕이므로 해치지 않겠노라’고 말했습니다.

13절

옛 속담에 ‘나쁜 일은 나쁜 사람에게서 나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왕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14절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잡으려 하고 있습니까? 왕이 뒤쫓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왕은 죽은 개나 벼룩을 뒤쫓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16절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정말 네 목소리냐?”하고 말하면서 크게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19절

자기 원수를 손 안에 넣고도 좋게 돌려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20절

네가 틀림없이 왕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너는 이스라엘 나라를 잘 다스리게 될 것이다.

 

    다윗이 사울을 부끄럽게 한 첫 번째 이야기다. 다윗이 세력을 규합하고 명분을 축적하는 과정이다.

    사울을 피해 부하들과 도망 중이던 다윗이 동굴 안쪽 깊은 곳에 숨어있었는데 마침 용변을 보기 위해 사울이 이를 알지 못하고 동굴로 들어간다. 다윗은 사울이 눈치 채지도 못하게 사울의 옷자락만을 잘라내고 왕을 살려 보낸다. 이를 뒤늦게 안 사울과 다윗과의 대화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한 때 은혜를 입고 왕으로 모셨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왕을 죽이는 것이 ‘나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본인, 후에 왕이 되는 다윗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권선징악, 사필귀정, 인과응보다. 나쁜 일을 하는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예비되어 있다. 남을 해하면 자신도 해를 당한다. 경계할 일이다.

    대권을 사이에 둔 정적이라도 함부로 권력을 사용해 탄압하거나 부당한 수단으로 뒤엎거나 보복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증오하고 경멸하더라도 최소한의 대우는 해주어야 한다. 왕의 왕이 된 이유, 이력이 있다. 민주화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아무리 내 스타일이 아니고 인격적으로 밑바닥이더라도 그 직분은 존중해주어야 한다. 자연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왕이고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를 지지한 수많은 국민들의 뜻이 있다.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다.

    물불 안 가리는 민주주의의 적들 앞에 너무 공허하고 나이브한 입장인가. 그렇더라도 심판은 정당한 수단이어야만 한다. 얼마든지 준엄하게 추상같이 할 수 있다. 30%의 지지를 받는 잘못된 권력은 50%의 지지를 얻어 교체하던지 70%의 반대세력을 결집해서 혁명을 통해 뒤엎든지 해야지 암살, 사적 보복 등 인권과 절차를 무시한 야비하고도 추악한 부당한 방법이어서는 안 된다. 명분이 있더라도 민심, 세력이 받쳐주는 못하는 정변은 꼭 후폭풍이 있다. 뒤탈이 난다. 죄가 죄를 부르고 보복이 보복을 낳는 악순환일 뿐이다. 어떤 심판이라도 인간에 의한 심판은 완전하지 않다. 법의 심판, 정치적 심판, 역사의 심판이 있다. 하지만 결국 완전무결한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다시, 하나님의 몫이다.


    다윗은 ‘죽은 개나 벼룩’ 같은 하찮은 존재인가. 사울 왕을 설득하기 위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인가. 원래의 겸양지덕인가. 반반이다. 둘 다이다. 다윗은 기지가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물론 사울 앞에서도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울을 아버지같이 따랐으며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

    사울 역시 마찬가지다. 사울에게 다윗은 믿음직한 부하였고 아들같이 사랑한 사위였다. 아직도 그 마음이 남아있다. 애증의 관계다. 사울의 눈물은 진심이었으리라. 하지만 하늘 아래 함께 있지 못할 운명적 정적임에는 변함이 없다. 사울은 다윗을 위해 울고 그가 ‘죽은 개나 벼룩’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하는 왕이 되리라는 것도 인정한 후 자기 왕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울은 이후에도 다윗을 쫓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25장 10절

나발은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다윗이 누구요? 이새의 아들이란 자가 도대체 누구요? 요즘은 자기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종놈들이 많다던데”

 

    다윗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요청하는 다윗의 부하들에게 나발이 다윗을 모욕하며 하는 말. 나발이 다윗이란 이름을 모를 리 없다. 왕과 왕을 피해 도망다니는 왕의 최대의 정적, 숨 막히는 추격전, 장안의 최대화제다. 가장 비신사적인 모욕이다. 다윗이 들으면 부들부들 분노게이지 급상승이다. 나발은 타고난 악플러! 난다 긴다 하는 지금의 악플러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나발은 엄청난 부자였으나 무자비하고 속이 좁은 사람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도덕성이 결여된 졸부, 수전노쯤 되겠다. 돈만 많은 속물이다. 그런 그가 생각하기에 다윗은 도망친 종놈이고 사울왕은 종놈을 쫓는 주인일 뿐이다. 다윗과 사울의 애증의 관계를 알리도 없고 관심도 없다.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도 내 알 바 아니다. 단지 자기 욕심뿐이다. 돈을 향한 욕망만으로 가득 차 세상을 가장 단순화시켜 그 표피만을 바라본다. 행여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하면서도 언제 잡힐까, 어떻게 죽일까 궁금증만으로 입방아를 연신 쪼아대는 가벼운 민심이다.


    격노한 다윗은 직접 나발을 죽이려 부하들과 나선다. 뒤늦게 자초지종을 들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바삐 풍성한 음식들을 준비하여 남편 몰래 다윗을 맞으러 나가고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 그를 축복하고 칭송하며 대신 용서를 구한다. 결국 다윗은 길을 되돌린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목숨을 구한 나발은 아비가일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심장이 멈춰 돌처럼 몸이 굳어지더니 십여 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 심장마비? 심근경색? 배포가 작은 겁쟁이였나. 하여튼 충격이 컸나 보다. 하나님이 다윗 대신 벌을 내리신 것이다.

    남편보다 아내가 낫다. 남자보다 여자가 지혜롭다. 나발보다 아비가일이 담대하다. 이 일이 있은 후 다윗은 아비가일을 아내로 삼는다.



26장 10절

여호와께 맹세하지만 여호와께서 직접 사울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오. 사울은 죽을 때가 되어 죽을지도 모르고 싸움터에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오.

19절

만약 왕이 나에 대해 진노하게 하신 분이 여호와시라면, 여호와께서 나를 제물로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만약 왕이 나에 대해 진노하게 한 것이 사람들이라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저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땅에서 나를 쫓아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낯선 땅에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라’하고 말했습니다.

21절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너라. 오늘 너는 내 생명을 아껴주었다. 그러니 이제 나도 너를 해치려 하지 않겠다.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하였다. 내가 큰 실수를 하였다.

22절

여기 왕의 창이 있습니다. 신하 한 사람을 이리로 보내어 가져가게 하십시오.

 

    다윗이 사울을 부끄럽게 한 두 번째 이야기다.

    10절은 적진 한가운데서 잠이 들은 사울왕을 몰래 함께 잠입한 아비새가 죽이려 하자 다윗이 아비새를 저지하며 하는 말. 대신 다윗은 사울의 머리맡에 있는 사울의 창과 물병을 가지고 온다. 여호와께서 사울의 군대를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사울은 다윗의 예언대로 블레셋과의 전투에 져서 자결하게 된다.

    19절은 이 사실을 안 사울에게 다윗이 하는 말. 다윗은 원치 않게 고향을 등지고 도망치는 신세다. 하나님을 섬기며 동족을 사랑했던 다윗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언뜻 며칠 전에 유명환 외교부 장관이 했던 망언이 생각난다. “젊은 이 한나라당 찍으면 전쟁이고 민주당 찍으면 평화라고 해 거기에 다 넘어갔다. 그렇게 (북한이) 좋으면 김정일 밑에 가서 어버이 수령하고 살아야지.” 한나라당 안 찍으면 빨갱이고 반역자다? 한나라당 반대하면 뭣 모르는 철부지다?

    참으로 단순·무식·용감하다. 찌르면 바늘이 튕겨져 나올 정도의 이 완고함에 숨이 턱턱 막힌다. 오만과 독선의 꼰대정신이 하늘을 찌른다. 무섭고도 유치한 이분법이다. 북한 독재정권도 싫어하고 한나라당 수구정권도 싫어하는 국민들은 제 3 국으로 망명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배웠다는 사람, 한 나라의 최고 외교수장의 인식이 이 정도니 우리나라 보수세력의 그 천박함의 밑바닥은 어디인가. ㅠ.ㅠ




새싹과 고목, 꼰대와 촛불소녀, 유약함과 완고함

종교적으로도 성스럽되 완고하지 않고 속되되 천박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



    21절은 사울이 다윗에게 22절은 다윗이 사울에게 하는 말. 사울은 돌아오라 하지만 다윗은 가지 않고 대신 사람을 보내어 왕의 창을 가져가라 한다. 사울은 후회하지만 다윗은 믿지 않는다. 부끄럽고 뻘쭘하다.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 땅을 떠나야만 이 추격전이 끝나리라 여기고 일찍이 피신한 적이 있던 블레셋 땅 가드의 아기스에게 몸을 의탁한다.



29장 9절

너는 나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와 같이 소중하다. 하지만 블레셋의 지휘관들은 ‘다윗은 우리와 함께 싸움터에 갈 수 없다’라고 말하니,

10절

아침 일찍 날이 밝으면 너와 너의 부하들은 떠나라.

 

    블레셋이 사울왕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자 다윗은 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아기스를 따라 참전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출신인 다윗의 전력을 들먹이며 다른 블레셋 지휘관들이 다윗을 의심하고 꺼려하자 아기스가 다윗에게 되돌아갈 것을 이르며 하는 말.

    만약 다윗이 전 이스라엘을 상대하는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어 자기 동족을 죽이게 되었다면 그는 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되더라도 두고두고 시비거리다. 다윗에겐 잘 된 일이다.



31장 4절

“저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 나를 조롱하고 죽이기 전에 네가 나를 죽여라.” 그러나 사울의 부하는 두려워서 사울을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 칼을 가지고, 칼끝을 배에 대고 그 위에 엎드렸습니다.

 

    사울의 비참한 최후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죽고 자신도 큰 부상을 당해 패색이 짙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사울과 다윗(Saul and David) - 렘브란트(Rembrandt)
사울왕의 괴로움을 수금을 타 위로하는 다윗. 그들의 친밀한 초기관계, 예비된 긴장관계를 그리고 있다.



    한 때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어 영광을 누렸던 자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멀어져 죄를 짓고 하나님이 보내신 나쁜 영에 괴로워하여 정신적으로 거의 조울증과 유사한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만다. 성격이 점점 포악해지고 협소해진 끝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 인물이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거두셨다.


    사무엘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