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04 : 창세기 16장~28장

어멍 2010. 3. 2. 00:24
 

16장 5절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수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하시고 이름을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 그의 아내 사래는 사라로 바꾸신다.



18장 24절

만약 저 성 안에 착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저 성을 멸망시키시겠습니까?

26절

만약 저 소돔 성 안에 착한 사람 오십 명이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라도 저 성 전체를 구원해 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겠다는 하나님에게 아브라함이 묻자 하나님이 대답하신다. 이후에도 거듭 열 명이라도 있으면 어쩌시겠냐고 묻자 역시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고 만다. 오십 명에서 열 명까지, 숫자는 상징일 것이나 소돔과 고모라에는 착한 사람이 실재로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타락상이 극에 달했다는 거다. 하나님의 뜻과 바람은 멸망에 있지 않고 구원에 있다.



19장 26절

롯의 아내는 그만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천사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해 내올 때 천사의 경고를 잊고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물론이고 여러 설화와 옛 이야기들이 마찬가지다. 판도라의 상자, 99일째 되는 날에 보지 말라던 착하고 예쁜 색시를 몰래 훔쳐보아 인간이 되기로 약속된 100일을 채우지 못한 구미호의 안타까운 전설까지...금기란 범하라고 있는 거고, 법이란 어기라고 있는 거고, 기록이란 깨지라고 있는 걸까. 종교적, 도덕적으론 어떨지 몰라도 역설적이게도 이 말은 논리적으론 맞다. 범하지 않는 금기, 지켜지기만 하는 법규, 깨지지 않을 기록은 지상에 사는 인간에겐 그 존재의미가 없거나 효용가치가 없다.



22장 2절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네 아들을 잡아,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로 바쳐라

9절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벌여 놓은 다음, 자기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10절

그리고 나서 칼을 들어 자기 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12절

네 아들에게 손대지 마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마라. 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낌없이 바치려 하는 것을 내가 보았으니,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이제 알았노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시험하는 대목.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먼저 얻었으나 하나님의 축복, 장자의 축복을 받은 이는 아내 사라에게서 얻은 이삭을 거쳐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둘째인 야곱으로 이어진다.

    예전부터 많이 고민되었던 대목이다. 완전하시다는 하나님께서 시기, 질투, 의심에 시험까지. 자애롭고 사랑 가득한 하나님께서 이토록 잔인하실 수 있을까? 인간과 인간과의 보통의 관계, 그저 그런 평범한 관계라면 결코 용납지 못할 일이다. 사람을 떠 보고 간 보는 것이냐며 분노에 앞서 짜증부터 난다. 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지만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의심하고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이 완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서다. 인간의 책임이고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을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있으면 일을 맡기지 마라’라는 <사기>의 말은 현명한 인간경영, 처세술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리는 아니다. 아무리 굳은 맹약, 금강석같이 단단한 믿음도 결국은 깨지고 흩어진다. 세월이 지나고 처지가 바뀌면 사람은 변한다. 면종복배! 겉모습은 복종하는 체하면서 속마음은 배반함은 다반사요 배은망덕! 은혜를 잊고 도리어 악행으로 뒤통수를 치기도 하고 토사구팽!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없이 신뢰를 거두고 헌신짝처럼 버리기도 한다. 인간의 언어, 인간의 약속. 부질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바란 것은 그런 인간의 약속, 신의가 아니었다. 완전한 믿음, 완전한 약속이었다. 순교의 경지다.

    신앙을 떠나 나의, 우리의 사랑의 강도는 어떠한가. 아무런 사전설명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절대 동의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얼토당토않은 부당한 요구를 해온다면 나는 과연 그 요구에 순순히 응할 수 있을까. 의심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도, 퍼렇게 날선 칼날 위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있을 수 있을까? 자문해 본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각자에게 감당할 만한 시험, 시련을 주셨다. 아브라함의 기존의 믿음으로는 그 시험을 감당할 만했다. 갓난아이에게 벌떡 일어서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라 육상선수에게 더 빨리 뛰라고 명하신 것이다. 설혹 상황이 더 진행되어 죽음의 문턱에 이른 때라도 멈추셨을 것이며 끝내 죽었더라도 다시 살리셨을 것이다. 단 몇 사람의 착한 이, 죄 없는 이를 위해서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치 않고 구원하시려던 하나님, 이들을 천사로 하여금 손수 탈출시키셨던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26장 7절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 곳 사람들이 이삭에게 그의 아내가 누구냐고 물어 보면 이삭은 “저 여자는 내 누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자기 아내라고 말하기가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이 리브가를 빼앗기 위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삭도 아브람과 같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다. 이렇듯 구약의 세계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여럿 나온다.

    성경의 해석은 일단 접어두고 사회학적, 인류학적으로 접근해보자. 고대 이스라엘 지역은 지금도 남아 있는 여러 부족의 생활양식과 같이 농경사회가 아닌 유목사회였다. 그 부족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다. 따라서 자손이 많은 것이 부족의 크기, 권력의 크기를 좌우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도 많은 자손을 갖게 해주겠다는 내용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초기 가나안 사람들이 믿었다는 토지의 비옥함과 생물의 번식을 주재하는 신, 즉 풍요와 다산의 신인 바알신앙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문명과 제도가 발달하지 않은 고대사회, 원시사회에서의 최대의 관심사는 생존, 종족보존이다. 어떠한 가치도 이에 우선하진 않는다. 지금의 제도, 지금의 시각에선 이해하기 힘든 일부다처제, 친족이나 사촌간의 결혼 심지어 롯과 그 두 딸과의 관계뿐 아니라 가인의 살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유목사회는 비옥한 땅, 우거진 목초지, 맑고 풍부한 샘물을 두고 이동하는 부족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뺏고 뺏기는 다툼, 전쟁의 소지가 있는 갈등의 사회였을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 인물과 인물들과의 계약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은 것도 그 연유이지 않을까. 다툼의 소지가 많은 갈등사회였으므로 역설적으로 엄격한 계약, 맹약이 더욱 필요하고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유태인과는 계약서를 쓰지 말라는 격언 비슷한 말이 전해져 온다. 그만큼 계약에 관한 한 그들이 밝고 철저하여 백이면 백 손해를 본다는 말일 것이다.

    하여튼 아브람과 이삭이 아름다운 아내를 누이로 속인 행위, 그들이 자기 아내를 빼앗길까봐, 자신이 죽임을 당할까봐 극도로 두려워했다는 것은 그만큼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사내를 죽이는 행위가 실지로 빈번했음을 반증한다. 아마도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상은 이러한 재물과 여자의 약탈, 거짓과 사기, 폭력과 살인, 난교 등이었을 것이다. 성경, 특히 구약이 보여주는 세계는 미성년자 시청금지의 하드코어 성인물이다. 하지만 세상의 본질이 그렇다, 실재의 사건이 그렇다는 기술(記述)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정직하며 사실적이다. 어찌보면 옛이야기 설화의 구조로 보기에는 사실적인 성격이 강하고 종교적 경전으로 보기에는 너무 적나라하고 잔혹하기까지 한 측면이 있다.



27장 22절

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 같은데 손은 에서의 손처럼 털이 많구나.

 

    이삭의 쌍둥이 둘째아들 야곱이 자신이 첫째아들 에서인 것처럼 꾸며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는 대목. 여기서 <쉬운 성경> 박스 해설을 보자.

성경속의 궁금증 : 거짓말쟁이 야곱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다니

야곱이 거짓말을 하고도 그 값을 치르지 않은 채 넘어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외갓집으로 도망가야 했고, 외삼촌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에 야곱에게 언약을 상속케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창 25:23), 야곱이 참고 기다렸다면 그는 그처럼 모진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하지 않아도 될 괜한 짓을 한 셈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신다.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며 진행형이다.



28장 12절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사다리 하나가 땅에 세워져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다리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13절

야곱은 여호와께서 사다리 위에 서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소위 '야곱의 사다리(Jacob's Ladder)' 이야기. 야곱이 형인 에서를 피해 도망가던 중 들판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보았던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무지개로서 언약하신 것을 빗대 서양인들은 구름사이로 빛이 내리비치는 빛내림을 야곱의 사다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야곱의 사다리(Jacob's Lad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