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02 : 창세기 3장~6장

어멍 2010. 2. 10. 23:06

3장 4절, 5절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죽지 않아.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고 너희 눈이 밝아지면, 선과 악을 알게 되어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까 봐 그렇게 말씀하신 거야.”


    3장은 죄의 시작. 그 유명한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 얘기다. 뱀이 여자(하와. 이브는 하와의 영어식 표현)에게 속삭인 말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죄는 욕심에서 시작되고 욕심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된다. 그 불신의 정체는 시기와 질투이다. 식욕 등의 생리적 욕구 외에 인간의 가장 원초적 심리, 감정은 바로 이것이다. 신에 대해서도 시기, 질투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다.

    원죄를 지은 인간, 끊임없이 오류와 죄악을 저지르는 인간은 순자의 성악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인간은 만물 중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존재이자 가장 정성을 쏟아 창조한 피조물이다. 애초에 하나님이 악한 존재로 만드셨을 리가 없다. 결론은? 인간은 악한 존재일수도 있고 선한 존재일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악한 본성도 있고 선한 본성도 있다. 인간이 죄악에 빠지는 것은 본래 악한 존재이서라기 보단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하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겸허할 지어다.


10절

아담이 말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지만 벌거벗었기 때문에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논리적으론 약간 아귀가 맞지 않는다. 보통 ‘벌거벗었기 때문에 부끄럽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숨는 것은 같으나 벌거벗은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워 숨은 것일까? 두려워서 숨은 것일까?


    아마존 원주민들은 그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죄의식도 없다. 하지만 도시로 나오거나 문명이 그 곳으로 들어가면 그들도 의복을 걸치고 함부로 벗지를 못한다. 선악을 분별한다는 것이 지식이요 지식이 곧 문명이다. 우리의 지식은 올바른 지식인가? 지금의 문명은 올바른 문명인가? 눈이 밝아지고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의 품성을 따른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 도달하여야 할 이상적인 최고경지 아닌가. 문제는 알아도 잘못 안다는 거다. 선보다 악에 먼저 눈 뜬다는 거다. 아마존 원주민들을 개명(?)시키는 것을 큰 사명이나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가? 거목을 베어 고급가구를 만들고 자원을 개발하여 인간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을 선이라 여기지는 않는가? 끝 없는 증산, 더 많은 소비를 원하며 소비는 미덕이요 절약은 궁상이라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정녕 원죄를 짓고 하나님의 세계를 훼손하는 것이 인간과 문명의 숙명인가!

    '두렵다'는 것은 자기 밖의 대상에 대한 감정이다. '부끄럽다'는 것은 자기 안의 어떤 것에 대한 느낌이다. '부끄럽다'는 것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감정이지만 '두렵다'는 것이 밖을 향한 감정이라면 '부끄럽다'는 안을 향한 감정이다. 우스개소리로 발개벗어도 얼굴만 가리면 상관없다지만 부끄러움은 자기를 향한 실존적 감정이고 윤리적으로 가장 근원적인 의식(意識)이다. '무서움을 모르는 인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 중 무엇이 (세속적으로) 더 큰 욕인가?
    처음의 질문에 대한 내 답은 부끄러워서 숨었을 수도 있고 두려워서 숨었을 수도 있다. 둘 다 말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의 '부끄러움'의 본 뜻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의식을 대면한 존재론적, 윤리적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인간이 자의적으로 분별하는 것에서 잉태한 부끄러움, 굳이 부끄러워 하지 않아야 될 것에 부끄러워하는 잘못된 부끄러움이란 역설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위 구절은 중층적 의미를 띠고 있어서...한꺼풀 벗겨보면 '두려움'을 말하고 있고, 두꺼풀이면 '세속적, 일반적 부끄러움'이고, 세꺼풀이면 '실존적, 윤리적 부끄러움'을 말하고 있다. 종합하여 내 마음대로 결론내자면 '원죄란 인간이 자의적으로 갖게 된 잘못된 부끄러움'이란 말이 아닐까. 얼마나 많은 인간들의 오류와 죄악이 있어왔고 계속되고 있는가. 그것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무엇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고 무엇이 진정 부끄러운 것인가 하는 잘못된 분별 혹은 '참된 부끄러움'의 결여다.
    그래 똑바로 살자. 착하게 살자. 참된 부끄러움, 올바른 윤리의식을 갖자.......그럼 이게 다일까. 좋다. 하지만 윤리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성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예절, 풍습과도 같이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절대적이지 않다. 같은 행동도 이 곳에선 떳떳하고 저 곳에선 부끄럽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것을 규정하고 약속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다. 결국 보잘 것 없는 '인간'인 거다. 그래서 땅의 윤리보다 하늘의 법이 중요하다. '인간' 밖에 있는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이 필요하다. 자기 안에서 부처를 발견하고 그것을 구현하여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일갈하는 경지의 해탈,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의 교리와 매우 대비된다.
    세속에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 더 큰 욕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무서움을 모르는 인간'이 더 큰 욕이다. 교만이 가장 큰 죄다. 전자가 인간적 한탄, 비난에 그친다면 후자는 하나님의 경고, 저주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

    왜 원죄인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여서가 아니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인간 존재로서 갖게 된 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스스로를 구할 수 없다. 우물안 개구리는 바깥 세상을 알지 못한다. 아무리 겸손하게 성찰하고 깊게 생각해도 자신의 거울만 바라봐서는 자신이 아름다운지 흉한지 알 수 없다. 창을 열고 행인들을 보고서야 자신을 알 수 있다. 문을 열고 거리로 나가 그들과 어깨를 걸고 말을 섞어보아야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있고 산 너머의 마을과 바다 건너의 나라에 대해 알 수 있다. 결론은...다시...겸허할 지어다.
    나와 내 안과의 대화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깨닫는다. 나와 내 바깥과의 대화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겸손함을 깨닫는다. 벌거벗은 한 인간으로서 정직하고 겸허하게 나와 하나님과의 대화, 성과 속, 안과 밖의 대화에 임해야겠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대결론(大結論), 하나님의 뜻은 말씀 그대로의 '두려워서' 숨은 것이다. 두려워할 지어다. 겸손할 지어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언 18:12]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언 21:4]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언 3:5]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전에 진리는 우리를 겸허케 한다.


    밖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안으로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어떤가. 인간과 인간이 이룬 문명은 어떤가. 벌거벗었다는 것은 이런 문명, 선악과와 관련된 (큰) 상징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액면 그대로 해석해도 하나의 (작은) 상징으로 역시 말이 된다. 벌거벗었기 때문에 (자신의 벗은 육체가 아닌) 자신이 저지른 죄를 감출 도리가 없어 두려워서 숨었다는 비유일 수도 있으니까. 이 경우 아담은 최소한 자신의 죄에 대한 부끄러움, 죄의식, 두려움은 남아있는 거다. 만약 죄를 짓고도 은근슬쩍 감추거나, 아닌 척 속이거나,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뻔뻔하게 나도 좀 먹고 똑똑해지자고 고추를 달랑대며 따지고 대들었다면......당장 하나님의 불의 심판이 내려졌을 것이다.
    죄지은 놈보다 나쁜 놈은 핑계대는 놈, 핑계대는 놈보다 나쁜 놈은 감추는 놈, 감추는 놈보다 나쁜 놈은 속이는 놈, 속이는 놈보다 더 나쁜 놈은 뉘우칠 줄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히려 뻔뻔히 대드는 놈이다. 어쩌면 기왕의 죄보다 반성할 줄 모르고, 회개할 줄 모르는 도발적인 비열함, 끝 간 데 없는 교만함이야말로 인간이 갖고 있는 악마성의 진면목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문명이 없었던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아직까지는 죄의식, 두려움,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였다는 거다.
    

성경 속의 궁금증 : 죄를 범한 아담은 왜 금방 죽지 않았을까?


성경은 죽음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

1. 영적인 죽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부터 단절되는 것.

2. 육체의 죽음.

3. 영원한 죽음.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

 

    <쉬운 성경>의 해설이다. 아무리 악한이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교리에 비추어보면 3의 경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심판이 끝나고 이미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을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지옥에서라도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걸음마를 떼는 햇병아리지만 내가 아는 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는 ‘용서받지 못할 자’는 없다. 예수님도 자신이 못 박힌 십자가 옆에 같이 못 박혔던 범죄인의 회개에 구원을 베푸시지 않았던가.(이런 가능성을 믿는 기독교도라면 최소한 사형제만큼은 반대해야 한다. 더구나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돌이킬 수 없게 심판하는 것이 아닌가!)



선악과를 먹는 아담과 하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화.



    아담과 이브는 선악수의 열매인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알고 선과 악을 구별했다. 선악수는 영어로 ‘Tree of Good and Evil’, ‘Tree of Knowledge’다. 즉 선악을 아는 것, 지식, 인식, 안다는 것 자체가 곧 죄의 시작이다. 선악은 동전의 양면이니 선을 아는 것은 곧 악을 아는 것이요, 선만 알고 악은 건너 뛸 수는 없는 법이다.

    선악을 분별하고 사물을 분류하는 능력이야말로 하나님이 신에 버금갈 수 있도록 인간에게 주신 축복의 재능인 동시에 모든 죄악의 근원, 곧 원죄인 것이다.

    함부로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함부로 단죄해서도, 용서해서도 안 된다. 강한 것, 악한 것에 관용해서는 안 되고 약한 것, 선한 것에 가혹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 감수성을 유지하고 선이 온 하늘을 뒤덮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계를 열망하되 그것이 독선으로 흐르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고 함부로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까불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기 보단 우리를 겸허케 한다. 겸허한 성찰과 치열한 분별은 우리의 오류와 죄를 적게 할 것이다.


16절

너는 네 남편을 지배하려 할 것이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지배와 사모! 번역이 왜 이리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지배’에는 차지하고, 품에 가두고, 유혹하여 사랑에 눈멀게 하고 등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넘겨 짚어본다. 그래봤자 여자는 남자에 얽매이고 딸린 존재! 지배라고 해봤자 수동적 지배, 언제고 불안한 한시적인 지배다. 여자를 다스리는 것은 여전히 남자다. 창세기 2장 23절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든 구절과 6장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구절과 일맥상통하는 남존여비적인 시각이다.


22절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시황의 불로초나 무릉도원에 있는 천년만년 산다는 복숭아를 연상케 한다. 이 밖에도 하늘, 땅, 빛, 물, 흙, 뱀, 선악수, 선악과 등 구약에는 동서양의 고대설화들을 연상시키는 상징들이 많다. 스케일이 크고 상상의 공간이 넓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신약보다 재미있고 읽는 맛이 좋다.


4장 7절

네가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죄는 너를 다스리고 싶어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죄의 지배를 받지 말고, 죄를 다스리라!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자식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인다. 최초의 엄마, 아빠는 원죄를 지었고 최초의 자식은 친족살해의 죄인이다. 어둡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엄격하고 매정한 교수님처럼 야속하고 잔인하기까지 하다. 아! 인간이란, 나란 존재는 이런 거군요.ㅠ.ㅠ

    아담에서 가인을 거쳐 가롯 유다까지. 인간은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거역하고 배반하였다. 10계명의 존재는 그만큼 많은 죄를 저질렀다는 반증이다. 구약, 신약과 이후의 전쟁, 약탈, 학살 등의 역사까지. 소담했던 아담 가족으로부터 그 자손과 자손의 자손의 가족까지 이어지는 전 인류의 잔혹사이다. 그리고 최후의 (불의) 심판까지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과 이 세계는 결코 밝고 낙천적이기만 한 세계라고는 볼 수 없다.


6장 5절, 6절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의 악한 행동이 크게 퍼진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언제나 악할 뿐이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죄 많은 인간들이 어지럽히는 어두운 세상!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후회하시고 아파하시고 분노하셔서 급기야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하신 후 물의 심판을 내리신다.
    우리 속담에도 '머리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런 수고와 마음고생을 하시는가. 더구나 예수님의 피의 보혈로 대속까지 하시다니...
    하나님은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시고 흡족해하셨다. 축복하시고 대속까지 하신다. 심판을 하시지만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언제나 용서의 은혜를 베푸신다. '당신(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는 불완전한 인간, 심지어 악한 본성쪽에 가까운 인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하시고 구원하시는 데에 있다. 최초의 아버지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마음은 부모의 마음이다.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축복하심은 주의 은혜다. 인간에게 불완전성과 함께 자유의지를 줌으로서 역설적으로 스스로 구원의 기회를 허락하신 것과 악을 통하여 선을 드러내심은 하나님의 섭리다.

    진실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랍다.'
    진실로 '이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섭리가 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