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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트로스(Albatros)에 대한 단상-1994년 대학 동아리 소식지에 기고한 글

어멍 2009. 12. 17. 00:25

 



                 알바트로스(Albatros)

                          - 샤를르 삐에르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흔히 뱃사람들은 짐짓 즐기기로

           거대한 바닷새 알바트로스를 붙잡아 히히댄다.

           고해(苦海) 미끄러져가는 선박 뒤따르는,

           항해의 무위로운 동반자인 새를.


           뱃사람들이 판자 바닥에 팽개쳐 놓으면,

           가엾은 이 창공의 왕은 어설프고 부끄러워,

           민망스럽게도 크고 흰 날개를

           옆구리에 차고 노처럼 질질 끈다.


           나래 달린 항해자인 그는 얼마나 어색하고 무력한가!

           한때는 그리 아름다웠던 것이, 얼마나 추하고 우스꽝스러운가!

           어떤 이는 담뱃대로 그의 부리 건드려 역정 돋우고,

           어떤 이는 절름대며 훨훨 나돌던 불구자 흉내 낸다.


           <시인>은 마치 저 구름의 왕자를 닮았어라.

           폭풍우 넘나들고 사수(射手)를 비웃지만,

           야유 소리 들끓는 지상으로 일단 유배당하면,

           그 큰 날개가 걷는데 오히려 방해로울 뿐.




[1] 앞말

    이번에 우리 동아리에서 소식지 <기타등등>(참 좋은 이름이다.)을 낸다기에 재용님이 직접 찾아와서 섭외(?)하는 정성에 감읍하여(실은 건배님의 광기어린 게슴츠레한 눈빛이 두려워서) 펜을 들었어요. 무얼 쓸까 밤새도록 고민했지만(자면서) 마땅한 것이 없어서 수준있게 전에 읽은 시 한편을 소개하기로 했어요.

    제가 감명깊게 읽은 호리구찌 다이가쿠(堀口大學)씨의 명시 <乳房>을 소개하려다가 ‘외설이냐 예술이냐’하는 논쟁의 회오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눈물콧물 들이키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어떤 이는 가슴이 찡하면 예술이고 거시기(?)가 찡(?)하면 외설이라지만 나를 포함한 예비역들에겐 논쟁거리가 안 되죠. ‘외설이냐 예술이냐’하는 딱지가 붙은 것들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광신적 지지자거든요. 거의 짐승수준! 짐승에게 외설, 예술을 따지는 것은 고릴라 손에 쥐어진 지필묵처럼 한가하고 사치스런 고담준론 혹은 황당 코믹 시추에이션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실 여자 후배님들의 보복도 두려워요. 하지만 남자 후배님들을 위해서 쬐끔만 소개하기로 하죠.

    乳房 : 德은 외롭지가 않아 / 유방은 두 개가 있다. // 유방은 두 개가 있다. / 손바닥도 두 개가 있다. // 유방은 나의 / 손바닥 모양을 하고 있다......

    아쉽지만 여기서 그치기로 하죠. 근데요 이 시는 아주 아주 길어요.(남자 후배님들 나 미워요? 아우!!)


    말이 참 길어졌죠. 하지만 지금 저는 글을 늘리기 위해서 무우척 애쓰고 이이있다아암니이이다. 하지만 굳이 이럴 필요는 없지요.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제가 외우고 있는, 외울 수 있는 비장의 시가 있습니다. 바로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의 <눈(雪)>이란 시입니다. 무기교의 기교로 너무나도 유명한 시지요. 여러분의 충분한 감상과 제 사과의 의미에서 전문을 전격게제하기로 하겠습니다.

    눈 : 갑돌이를 잠재우고, 갑돌이네 지붕에 눈이 내리네 / 을돌이를 잠재우고, 을돌이네 지붕에 눈이 내리네 / 갑순이를 잠재우고, 갑순이네 지붕에 눈이 내리네 / 을순이를 잠재우고, 을순이네 지붕에 눈이 내리네 / 승만이를 잠재우고, 승만이네 지붕에 눈이 내리네 / 정희를 잠재우고, 정희네 지붕에 눈이 내리네 / 두환이를 잠재우고, 두환이네 지붕에 눈이 내리네 / 태우를 잠재우고, 태우(퍽! 윽! ㅠ.ㅠ)......        영~삼이를 잠(퍽. 퍼억! 오옷! @.@)......

    각설하겠습니다.(과감하게!) 근데요. 원문은 을돌이까지였습니다.(퍼버벅! ☆#$♨★...@.@)


                                              두환이네 집. 전두환씨가 한 때 은거했던 백담사 설경.


    시란 해석보다는 느낌이 먼저겠죠. 하지만 서정시란 것도 있고 서사시...등등, 여러 가지가 있죠. 이 시는 드넓은 수평선, 뭉게뭉게 뭉게구름, 마치 천상의 존재인 것같이 무한히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알바트로스, 거기다 석양까지 드리우면 그야말로 ‘데끼리!’ 장관이죠.(극장광고에선 이 장면엔 항상 여자가 닭살돋게 ‘행복해~요’를 연발하죠.) 거기다 망망대해위의 작은 고깃배와 텁텁하고 억세게 보이는 뱃사람들. 마치 한 폭의 인상파 작품의 풍경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죠.

    알바트로스. 그(것)는 지금 여기에 있어서 무엇이고 누구일까요? 영웅? 시대의 대속자? 아니면 연인? 그리고 당신은 누구일까요? 알바트로스? 뱃사람? 그도 아니면 방관자?

    중국속담에 ‘얕은 물에 사는 용은 새우에게 놀림을 당한다’라는 말이 있죠. 이 작품에선 주로 그러한 시인의 운명과 세정(世情)의 비속함을 말하고 있어요. 시인이란 안전장치 없이 하늘로 날아올라 산산이 부서지는 비행기, 자기를 불사르며 외롭고 아름답고 치열하게 떨어지는 별똥별-용기있게 고개를 돌쳐서 자신의 본연과 인생의 정수를 응시하고 맞닥뜨리는 광의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는 영웅일수도, 순교자일수도, 혁명가일수도, 자신의 정신적 지주의 대상일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좀 다른 각도에서 권위, 허위, 우상, 깊게는 존재와 연결돼 있는 것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 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시인에 대한 이미지는 현실에 있어서 대부분 이 문제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죠.



[2] 사회적, 정치적 권위

    대학도 급변하는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에 따라 많이 변한 것 같아요. 탈권위, 탈정치화되었다고나 할까요. 6공때부턴 정치인들이 코미디 소재로도 등장하고.(비록 진지한 사안을 희석시키는 결점도 있지만) 모두 사회가 점점 민주화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일 거예요.(비록 소시민적 이익집단화일수도 있겠지만) 민주화란 어차피 역사적 운명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아직도 그렇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아니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은 문화, 사회적 환경에 토대를 두고 있어요. 한민족에 있어서의 그러한 토대를 저는 크게 유교와 백의사상으로 봐요. 유교는 예의, 충성, 복종을 백의사상은 평화, 사랑, 용서라고나 할까요.

    우리나라는 프랑스나 기타 여러 나라처럼 왕을 죽인 역사(혁명이든 법의 심판이든 사회적 합의에 의한 단호하고도 가혹한 응징)가 없지요. 이러한 경향-절대권력에 대한 저항과 단죄가 빈약한 경향은 조선건국과 유교의 발흥, 근대에 있어서 뚜렷하다고 생각해요.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경험의 결핍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지금에 와서도 여전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좀 희박해졌지만 경로사상도 또 하나의 권위로써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요. 사실 인간의 가장 추악하고 비루한 모습중의 하나가 욕심만 덕지덕지 남은 늙은이의 모습, 노추(老醜) 아니겠어요? 물론 연륜이나 삶의 지혜나 사람됨까지도 나이에 비례될 수도 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요.

    아무튼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는 권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 글쎄요? 법관이 런닝셔츠만 입고 재판정에서 피고에게 판정을 언도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것이 가능할까요? 누구는 권위가 위협받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진정한 권위’라고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그 ‘진정한 권위’가 무어냐가 또 문제겠지만 대부분 기득권층의 자기보호와 권력유지를 위해 날조되고 미화된 개념인 경우가 많지요. 진정 ‘순 진짜 참 one hundred percent pure 권위’가 무엇인지 그 누가 정의할 수 있겠어요.


    분명한 것은 <검사와 여선생>처럼 법과 원칙의 엄정함과 개인적 은혜와 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안타까운 필부필부의 신파극보단 거악을 척결하고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쿠데타 세력을 준엄하게 단죄하고 그 수괴를 사형에 처하고, 사회적 공헌 운운하며 재벌 회장님들을 방면하지 말고 중형에 처하는 것이 떳떳하게 목에 힘줄 수 있는 참 권위에 훨씬 가깝다는 점입니다.

                                                      (참이슬 같기도 한) 100%! 순! 진짜! 참기름!


    저는 단지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pride는 통속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자존심, 소위 ‘존심’보다는 자긍심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봐요.)만 있으면 됐지, 상대적인 권위는 필요치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권위를 없애는 일은 권력을 없애는 일처럼 불가능하겠죠.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한 권력은 생겨나고 존재하며 권위는 그것의 토대요, 아류 또는 동족이니까요. 그리고 그 권위는 때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것의 신봉자들로 인해서 확대, 재생산되기도 하거든요.

    각설하고. 결론은 사람은 권력이든, 부든 연령이든 먼저 ‘인간’ 그 자체로 보여야 하고 보아야 한다는 거지요. 발끝도 보여서는 안 되는 청교도적인 인간상이나,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은 오직 폭력뿐이라는 군사문화적 인간상은 그릇된 양극단을 달리는 모델이랄 수 있죠.

    이상은 우리 문화의 단점(굴절된 단점)만을 부각시킨 것이고 실은 장점도 많지요. 그리고 어설픈 사고경로와 생각과 개념의 불일치로 문장이 조잡한 것. 계속 이해 바래요.



[3] 대장부적 남성상의 권위

    이것 역시 우리의 현실(특히 남성에게)과 밀접한 문제죠. 남자는 강해야 한다. 마음이 넓어야 한다.(여자들은 쉬운 것은 지들이 하면서 어려운 것은 왜 남자들에게만 시키는지 정말 억울해요. ㅠ.ㅠ) 물론 그러면 좋죠. 하지만 그것이 권위의 형태로 나타난다면 폭력이나 고집을 미화하고 자신에게는 자괴감을 가져다주기도 하지요. 또한 여성에게 있어서는 스스로를 안이한 위치에 머무르게 할 수도 있지요. 저는 남자든 여자든 일단 같은 인간으로 보고 싶어요. 그리고 남자에게도 약간의 애교와 섬세함이 필요하다고 봐요.

    옛날 막부시대의 사무라이 ‘사까모도 료오마(坂本龍馬)’는 칼바람이 일고 살점이 튀는 풍전등화 같은 일상생활에서 즐겨(?) 코딱지를 후비고 옷고름에 침을 묻혀 빙빙 돌리면서 주위사람들을 난처하게 했다고 해요. 비록 애교나 섬세함은 없었지만 대장부적 권위를 보기 좋게 뛰어넘은 인물이랄 수 있죠. 그리고 그것은 생사에 연연하지 않는 그의 사람됨으로 인해서 가능했던 걸 거예요. 하여튼 큰일을 하고 생사에 담담할수록 그 반대작용으로 세상의 소사에 연연하지 않는가 봐요.(저도 가끔 코를 후비지요. 근데 자꾸 들어가면 정말 ‘속傷해요!’)

    남자가 남자답고 여자가 여자다운 것은 원초적 매력이죠. 하지만 ‘대장부(大丈夫)’란 모델은 현대의 남성상으로는 이상적이지 못한 것 같아요. ‘요조숙녀(窈窕淑女)’도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긴 마찬가지죠. 하여튼 이러한 사회적으로 공인되고 이상화된 모델들은 평범한 남녀들에게 자의든 타의든 스트레스로 작용하기 마련이고 심한 경우 자괴감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같아요. 근데요. ‘마마보이’나 ‘파파걸’은 정말 밥맛이에요.


                                                  대장부와 요조숙녀의 21C 버전인 근육맨과 섹시걸



[4] 이성(異性)에 있어서

   이것은 권위라기 보단 우상이랄까요. 또 동시에 남성과 여성에 있어서의 일반성과 특수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구요. 넓게는 인간과 생물과의 일반성과 특수성도 관계되구요.

    우선 이런 얘기가 생각나네요. 남자가 여자에게 시련(또는 실연)을 당하거나 접근할 용기가 안 나거나 하면 그 여자가 똥을 누는 것을 상상하고, 정말 사랑한다면 그 여자의 똥 냄새도 향기로워야 한다는 얘기. 하지만 모두 틀린 것 같아요. 똥이 더럽다고 여자도 더러울 수 없고 여자가 예쁘다고 똥도 예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이런 말도 있죠. “똥을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또 이런 얘기. 저등생물 중에 대부분은 다른 기관은 없어도 소화기관과 생식기관만은 꼭 있대요. 생식기는 저등생물에서 발달해 있고, 고등생물에서는 퇴화해 있다고나 할까요.(상대적으로) 그리고 인간의 생식기가 신체 중에서 가장 독립적인(?!) 것이 그 퇴화의 흔적이라고나 할까요.(고추는 살아있다!) 하여튼 인간을 제외하곤 모두들 배우자를 고르는데 건강이나 생식능을 우선하여 자기복제, 종족유지만이 그 유일한 목적이죠.


                                           눈에 콩깍지가 씌이면 어떤 이론, 어떤 얘기든 소용이 없어진다.


    하지만 인간은 짐승이 아니고(간혹 타의 부러움을 받는, 짐승에 버금가는 왕성한 생식능만을 소유한 인간도 있지만-바로 짐승!) 미의식이란 게 있어서 이성에 대한 감정이 매우 복잡하지요.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는 일반성보다는 특수성이 우선하고, 또 특수하다고 생각하고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뚜렷한 것 같아요. 그리고 이것은 여성쪽이 비교적 강한 것 같아요. 비록 선택할 수 없고 선택받아야 한다는 억압(사회적, 자의적, 타의적, 일반적 억압)에 대한 반작용일지라도 말예요.

    백설공주나 인어공주,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멋지고 특별한 왕자님에게 운명적으로 선택되는 소위 공주류의 신데렐라 신드롬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저도 가끔 백마 탄(?) 공주님을 그려보곤 하지요. 아~흥! 몰러~유 / 바보 온달 신드롬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나도 수많은 남자(여자) 중의 한 사람이고, 그녀(그)도 수많은 여자(남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죠.


                                          아무리 주위에서 수근거린다 해도 모든 남성의 선망인 바보온달


    사랑이라는 것은 단지 대상이 이성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죠. 이해와 우정과 그리고 정신적 일치감도 있어야겠죠. 결론을 말하자면 사랑은 어려운 것도 그렇다고 결코 쉬운 것도 아니고, 이상만으로도 안 되고 육체만으로도 안 된다는 거죠. 이성 앞에서 벌벌 떠는 사람이나 이성에 대한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은 모두 불행한 사람일 거예요.



[5] 존재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다른 것과 다른 중요한 그 무엇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권위나 우상에 대한 집착이나 추종은 언뜻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담담함으로 보일지 모르나 기실 그 경향이 뚜렷한 것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닐까요?

    밀란 쿤델라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얘기했지만, 왜 우리는 때때로 ‘존재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을 얘기하지 않을까요? 참을 수 없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기쁘다는 반어적 표현이 아닌 한 우리는 더 이상, 살아가면서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집착한다면 이제는 미숙아(또는 반숙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는 철학사전에서 ‘존재’라는 단어를 빼버릴 만큼 성숙해야 되지 않을까요? 인격도야, 자아성찰로서의 내면적 존재에 대한 관심을 차치하고서라도(그리고 그러한 인격도야, 자아성찰은 非我와의 관계에서 발현될 때 더욱 빛을 발하고 검증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까요? 까요?



[6] 맺음말

    알바트로스는 시인이며 순교자고 선구자며 인텔리(인텔리겐자)며 동시에 ‘인간’이랄 수 있어요. 보들레르는 그 민망한 모습을 한탄하였지만 진정한 알바트로스는 분명 그 모습마저 담담히 받아들였을 거예요.(조금 원망스러웠겠지만)

    역사는 민중에 대한 인텔리의 배신의 연속이기도 하였지만 인텔리에 대한 민중의 배신의 역사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인텔리 의식이 아닌 인텔리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민중을 원망하면서도 끝내는 사랑할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우상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서 그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자신의 우상’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거죠. 우상에 대한 추종은 집착과 맹목적 복종의 또 다른 얼굴이며 작게는 자신을 속박하죠.


    쓰다 보니 길어졌네요. 보들레르의 시는 정제되어 깊은 맛이 있는데 사설은 길고 어지럽네요.(이것이 '시인', '깨달은 자'의 위대함이겠죠. 단 몇 마디의 짧은 말로 이 세상을 설명하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능력!) 아마도 용두사미,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그 나중은 심히 미약하게 되고 있는, 될 것 같은 이 불길한 느낌! 그리구 처음 생각과는 달리 더티하고 외설스런 것 같아요.(하지만 뛰어난 예술은 외설과의 절묘한 줄타기랍니다.) 무료하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짧은 생각이나마 적어보았으니 꼬치꼬치 트집잡지 말아줘요.

    우리가 이 시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뭘까요. “사람팔자 시간문제입니다” 잘났다고 두려워 말고 못났다고 깔보지 마세요. 잘났다고 젠 체 말고 못났다고 슬퍼 말아요. 그리구요, 기타 열심히 쳐요.(클래식 기타는 절대 외설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기타 예술을 기타 외설로 승화시킬 천재’의 도래를 고대하며......

    전 바빠서 이만.(역시 마지막 멘트치곤 너무 미약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