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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어멍 2009. 3. 20. 12:12

[1]


‘당뇨 지병’ 죽음 무릅쓴 절도

범행 후 10여m 못벗어나 숨져


60대 후반의 상습 절도범이 죽기 직전까지 남의 물건을 훔친 뒤 결국 길거리에서 숨을 거뒀다.

15일 강원 강릉경찰서에 따르면 14일 오후 7시쯤 강릉시 포남동 주택가 골목길에서 최모씨(69·경기 안양시)가 쓰러져 신음 중인 것을 주민들이 발견,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경찰은 최씨의 신원을 확인하던 중 대형 드라이버와 장갑 등 일부 ‘도구’와 타월·무릎담요·모조품 액세서리 3점·남성용 지갑·서류가방 등의 소지품을 발견했다. 경찰은 이 같은 소지품이 최씨가 쓰러진 곳에서 불과 10여m 떨어진 단독주택 주인 최모씨(55)가 도난신고를 한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했다.

경찰 관계자는 “최씨는 평소 시간대별로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할 만큼 심한 당뇨와 고혈압을 앓아왔다”고 말했다.

<강릉|최승현기자> (090116 경향신문 기사)

 


전갈 : 나는 헤엄을 못치니 네가 나를 업고 개울을 건네주렴.

두꺼비 : 네가 나를 찌르면 난 죽고 말거야.

전갈 : 네가 죽으면 나도 개울에 빠져죽을텐데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걱정 마.

(두꺼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갈을 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너기로 한다. 개울 중간쯤에 이르러 갑자기 높은 물결이 일자 전갈이 움찔하며 두꺼비를 찌른다)

두꺼비 : (죽어가며) 바보야! 왜 나를 찔렀니?

전갈 :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이게 내 본능인 걸. ㅠ.ㅠ

 


    천성(天性) : 명사. 타고난 성품.

    습성(習性) : 명사. 버릇이 되어 버린 성질.

    천성과 습성. 무엇이 더 견고하고 단단할까?
    얼마나 단단하기에 죽기 직전까지, 죽는 순간까지, 죽기를 무릅쓰고 어리석음을 감행하게 할까?


[2]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고종은 왕조의 존엄성은 고사하고 자기비하에 가까운 반성, 사죄의 글을 팔도의 백성에게 내린다.

“아, 부덕한 내가 외람되게 왕위에 오른 뒤 정사는 그릇되었고 백성들은 흩어졌으며, 위로는 죄가 쌓이고 몸에는 재앙이 모여들었다. 이 모두가 내탓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고종은 이렇게 운을 뗀 뒤 자신의 실정과 죄목을 구구절절, 조목조목 나열한 후 반란에 대한 선처와 새출발을 다짐한다.

하지만 이후 정사를 바르게 하기는커녕 군란에 동조한 이들을 추적해 처벌하기에 바빴고 사죄 1년 뒤엔 광화문 사거리에서 임오군란 주모자 7인이 처형된다.

 


2008년. 전국에서 촛불시위가 일어나자 이명박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행렬을 보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국민을 편안히 못 모신 것을 자책”했으며 “두렵고 겸손한 마음으로 새출발하겠다”고 다짐하며 ‘뼈저린 반성’을 했다.

하지만 이후 정사를 바르게 하기는커녕 촛불주모자를 색출, 추적, 처벌하기에 바빴고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과 유모차 엄마들까지 탄압하기에 이르고 급기야 미네르바(중의 1인?)라는 힘없는 일개 누리꾼까지 구속하고야 만다.

더욱이 새해 벽두부터 친북좌파, 불순세력, 발본색원 등 무시무시한 구시대 언어로 경고, 엄포를 놓으니 이 끝이 어딘가 두렵고 걱정될 뿐이다.

 

[3]


    얼마 전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이근안경감이 목사로 안수기도를 받았다는 뉴스를 접했다. 분명 축복하고 감동할 일일 것이나 그 순간 내가 받은 느낌은 감동이나 평안이 아닌 경멸이나 슬픔에 가까웠다. 거기다 약간의 분노까지. 그것은 영화 <밀양>의 ‘내가,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함부로 용서할 수 있는 거야’라는 절규의 공명, 잔향이었을 거다.

                                        2008년 10월 30일 목사안수를 받고 있는 이근안씨(당시 70세)
                       그의 사죄가 진심이었기를, 그가 하나님 품안에서 평안을 얻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김근태씨를(어디 그에게 당한 고문피해자가 김근태씨 한명 뿐이겠는가) 찾아가 사죄한 것이 아닌 용서하기 위해 찾아온 김근태씨에게 사죄를 베푼(!) 그였기에 ‘나는 빨갱이를 잡았을 뿐인데 정권이 바뀌니 죄인이 되어 있더라’며 아직도 반공간증, 반공설교를 하고 다닌다는 그였기에 내가 받은 느낌은 이근안 개인에 대한 느낌인 동시에 인간존재에 대한 비애, 환멸이랄까.

    드라마로 치면 동기도 부족하고 진정성도 의심되는 어설픈 반전, 값싼 개과천선같이 보여 부자연스러웠다. 반전이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려면 반전 그 자체가 설득력 있게 드라마틱해야지 엉성하거나 평범해서는 안 된다. 악의 평범성은 성립해도 개과천선은 평범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악인케릭터는 섣불리 타협하지 않고 꿋꿋이 악인, 악역으로 최후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리얼리티이자 작가의 힘이며 보기에 또한 자연스럽다.


    반전이야 낙차가 크면 클수록 드라마틱한 법이다. 종교적으로야 하나님의 기적과 영광, 능력을 드러내는 좋은 증거들이지만 사죄와 반성이 의심되는 이근안씨의 목사안수를 볼 때 세속적인 종교마케팅의 혐의에서 자유로운지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죄수, 범죄자, 사형수, 불한당, 이교도, 불치병자, 고문기술자...등의 간증. 평범한 또는 평범 이하수준의 사람들의 엄청난 세속적, 경제적 성공담만으로 교회안이 넘쳐나고 있지는 않은가. 부활의 하나님, 칼의 하나님만 섬기며 희생의 하나님, 십자가의 하나님은 멀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극적 드라마에 길들여져 범사에 감사, 일상의 기적에 둔감해진 것은 아닐까.

                                                     바위틈에 핀 꽃-생명, 살아있다는 것의 기적

[4]


    내가 사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서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티 없이 맑고 깊은 눈을 보라! 거기엔 ‘수우미양가’가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의 원형질, 유의 원천인 완전무결한 무가 있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 평가, 단정하여 수치화하거나 등급을 나누며 심지어 단죄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완전무결할 수 없으며 인간에 대한 예의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도 얼마나 오만하고 난센스한 태도인가!

    그렇다면 현실적, 도덕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단죄할 수 없듯이 함부로 용서할 수도 없는 것일까? 그것은 여전히 오만한 태도일까?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가해자들보다 오히려 간절히 용서(함)을 바라고 있다. 고통을 덜고 평안을 얻으려면 피해자들 역시 용서(함)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용서와 별개로 역사의 심판, 하나님의 심판은 남는다. 김근태씨의 소박한 바램이나 <밀양>의 절규 역시 개인적 욕심일 수가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너무나 가혹한 결론일까? 함부로 단죄하지도, 함부로 용서하지도 말라!


    정확히 얘기하자면 사람이 변하기란 매우 어렵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매우, 매우 어렵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 더 성숙한 태도이고 웬만하면 받아들이는 것이 덜 수고스럽다.

    독이 없으면 전갈이 아니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도둑놈은 도둑질, 노름꾼은 노름질, 사기꾼은 사기질, 삽질꾼은 삽질만 하게 마련이다. 할 수 있는 것이 그 것 뿐이고, 그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방기, 포기 또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일말의 가능성과 더 나은 삶의 희망, 더 나은 ‘진짜 관계’를 위해 교육, 교화, 설득, 소통, 교감, 나눔을 포기하거나 멈출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인류가 이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눔과 교감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풍요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설득하고 누군가를 자기 의도대로 변화시키려 한다면 비상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변화라는 것이 임팩트(충격, 영향력)의 강도와 지속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때 그 각오는 강도에 대한 각오보다 길고도 지루한 시간, 세월에 대한 각오일 것이다.

    가끔 일순간의 엄청난 충격이 내면에 각인되어 인격을 형성하고 한평생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 그대로 가끔일 뿐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개인의 인격과 성향은 장구한 시간에 걸친 소소한 일상의 축적된 결과이다.

    비상(非常)은 일상(日常)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매주 마다 로또에 당첨될 수도 없고 매일매일 데모나 시위를 할 수도 없다. 한순간의 비분강개보다 우리의 정치적 성향, 이념, 투표의 향방을 결정짓는 것은 매일 아침 어김없이 내 집 앞에 배달되는 신문의 논조이다.


    이러한 각오와 더불어 변화시키는 주체로서가 아닌 변화되는 객체로서의 겸허함, 인식과 자각이 필요하다.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바꾼다는 것, 그러면서 자기만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오만이며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파랑이 노랑과 섞여 녹색이 될 때 유독 자신만이 파랑으로 남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朱者赤), 교학상장(敎學相長). 미워하면서 닮고 욕하면서 동화된다고도 하지 않던가.


    세상에 공짜점심은 없다.

    원인 없는 결과도 없으며 노력과 정성 없는 진실한 관계도 없다.


    “비상한 각오로 끈질기게 겸허히 다가가기”

    이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이며 인간이 인간에게 지불해야 할 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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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 시작과 끝, 제목과 결론이 영 딴판인 반전의 드라마였음돠.

PS2 : 사랑하는 사람에겐 더욱 철저히, 후하게 지불하자.
PS3 :

忠言逆耳利於行 毒藥苦口利於病(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하기에 이롭고, 독한 약(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다.) - 司馬遷 <史記> [留侯世家] 中에서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것.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충고를 듣는 것.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 한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자신을 아는 것.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스스로 변화하는 것.

 

    남의 고언, 싫은 소리를 고맙고 즐거운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약점, 허물을 신랄하게 지적받거나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숨겨진 본모습의 정곡이 찔리면......아프다. 일단 조건반사적으로 불쾌하고 화부터 난다. 속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일단 부정하고 싶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개중에는 남의 고언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면서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평범한 속성이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영역이다.(물론 이 변화라는 것은 긍정적인, 발전적인 방향이며 단순한 변신이 아니라 질적 변화, 도약을 의미함이다.)


    변화는 어디서 오는가. 변화의 주체는 항상 안(內), 나(我)일 수밖에 없지만 변화의 원천,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절대적으로 밖(外), 나 아닌 다른 것(非我)에 있다. 변화라는 것 자체도 과거보다 미래, 기존 것이 아닌 새로운 것, 내가 아닌 새로운 나, 안보다는 바깥세상을 지향하고 있다. 병아리와 엄마닭이 내외호응하여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변화의 모양새지만 애초에 세상에 생명으로 던져진 것은 온전히 밖으로부터 주워진 것, 비아의 의지이다.


    변화의 바람은 밖에서 불어온다. 폐쇄되고 독립된 세계 안에서의 변화는 과연 가능한가. 과연 바람이 불 수 있을까. 태양이 없다면, 우주가 없다면 과연 지구는 스스로 자전할 수 있을까. 한 세계 안에서의 양적 팽창도 질적 도약으로 변화하려면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에너지 혹은 자극이 필요하다.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것,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칼뱅의 구원론, 예정론은 설득력이 있다.(물론 이 예정론은 구원에만 해당한다. 타락, 악행을 맘대로 하고 ‘이것도 예정된 거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악당, 악행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은 예정보단 ‘섭리’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오직 불새, 상상의 새만이 스스로 알을 깰 수 있는 것일까? 불새가 스스로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것은 자신만의 의지인가? 아니면 유전자의 형태로 밖으로부터 이미 주워진 능력의 발현인가?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내가 아닌가? 무엇이 안이고 무엇이 밖인가? 우리의 순수자유의지의 실체는 무엇인가? 있기는 한 걸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직은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결론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스스로에겐 준엄하게 구하고, 하나님에겐 겸허하게 기도하라.

    결국 원죄를 지닌 나약한 혹은 겸손한 인간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다소 식상하지만 유일한 결론이다.